[오늘과 내일/이승헌]MB에게 복수하는 방법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8월 1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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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헌 정치부 차장
이승헌 정치부 차장
영어 간판이 넘쳐나는 서울 강남 한복판에 묵향(墨香)이 가득하다.

벼루에 먹을 직접 간다. 그러고는 천자문을 쓴다. ‘하늘 천, 따 지’ 천자문이 아니라 말 그대로 천(1000) 자를 꾹꾹 눌러 쓴다. 붓도 큰 것, 작은 것 여러 자루다. 며칠 동안 계속 썼는지 까만 먹이 선명한 종이 수십 장이 뒤편에 걸려 있다.

요즘 이명박(MB) 전 대통령 사무실 풍경이다. 나흘 전 비서에게 전화를 했더니 그때도 마침 붓글씨를 쓰고 있었다. 몇 해 전 기자가 필자로 참여한 ‘(MB 5년) 비밀해제’라는 책을 전달하려 MB를 만났을 때도 비슷했다.

바깥활동 좋아하는 MB가 왜 붓글씨를 쓸까? 직접 물었더니 “마음을 다스리는 데 좋다”고 했었다. 아마도 두려움 불안감 회의감 등을 누르려 붓을 드는 것 같다. 요즘 문재인 정부의 검찰 라인업을 보면 더 그럴 것이다. MB 정부 국가정보원 댓글 사건 수사팀을 이끌다 박근혜 정부에서 좌천된 윤석열은 서울중앙지검장이다. 팀원이었던 진재선은 서울중앙지검 공안 2부장으로 최근 영전했다. 이 사건의 재수사를 맡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왜 MB를 겨냥하는지는 자명하다. “이명박 사죄해! 여기가 어디라고 와.” 2009년 5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장에서 MB를 겨냥한 백원우 당시 민주당 의원의 분노는 지금 벌어지는 많은 것을 설명한다. 장례식 상주 격이었던 문 대통령은 MB에게 사과했지만 마음이야 그랬겠나. 문 대통령은 훗날 인터뷰에서 “나도 (백원우와) 꼭 같은 마음이었다”고 했다. 백원우는 지금 사정라인을 실무 총괄하는 대통령민정비서관이다.


정치도 사람이 하는 것이어서 문재인 청와대의 심리를 이해한다. 잘못한 게 있다면 전직 대통령이라도 법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음을 우리는 박근혜 전 대통령을 통해 보고 있다.

하지만 정치는 타이밍의 예술이다. 북핵 사태는 6·25전쟁 이후 최대 위기를 넘어 전 세계의 1순위 이슈로 떠올랐다. 요즘 미국 워싱턴에서 이슬람국가(IS)는 김정은에게 밀려 존재감이 사라졌다. 촛불 정국 때보단 정도가 낮아졌다 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과거 역사를 탈탈 터는 적폐 청산이 여전히 문재인 정부의 국정 우선순위인 게 적절하냐는 사람이 적지 않다.

한미 간 수평 비교는 곤란하겠지만, 미국은 위기 상황에서 전직 대통령들이 머리를 맞댄다. 2014년 워싱턴 특파원 시절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이 IS 문제 등을 놓고 토론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둘은 동갑(71)이지만 모든 면에서 달랐다. 심지어 불구대천의 원수였다. 클린턴이 아버지 부시의 재선을 막았다. 그런데 둘은 웃으며 “조지 그림 실력이 나아졌다” “빌이 날씬해졌다”고 하더니 버락 오바마 당시 대통령에게 조언했다.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말라’ ‘미국은 위기에 뭉친다’는 게 핵심이었다. IS의 미 본토 테러 위협에 떨던 미국인들은 이런 메시지에 푸근함을 느꼈다. 하지만 우리는 문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이나 국가 원로 등 ‘과거 인사’들을 청와대로 불러 북핵 해결을 위한 지혜와 경험을 구하겠다는 말을 들어보지 못했다. 하긴 전직 대통령은 초청 대상도 마땅치 않다. 대부분 서거했거나 병상, 감옥에 있다. 자유로운 한 명도 주로 붓글씨를 쓰고 있다.

문 대통령과 주변 인사들은 임기 초 적폐 청산 이슈를 통해 지지 기반을 다지고 보수 세력의 설 자리를 더욱 좁혀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오히려 국정 에너지를 집중해 북핵의 실마리라도 잡으면, 안보 세력이라고 자임하던 ‘적폐 세력’에 이것만큼 시원하게 복수할 수 있는 것도 없다. 과거와 좌충우돌했던 노무현의 실패에서 배우고 진화해 오늘에 이른 문 대통령 아닌가.
 
이승헌 정치부 차장 ddr@donga.com
#이명박 정치 보복#정치는 타이밍의 예술#적폐 청산#문재인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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