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을 위한 희생이 그리스도의 가치”… 시복시성 새 길 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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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년 7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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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 교황, 자의교서 ‘이보다 더 큰 사랑’의 의미

장긍선 신부가 그린 성화 ‘평양교구 하느님의 종 24위’. 104×134cm. 목판에 전통 에그템페라(천연 안료와 달걀노른자를 섞어 색을 만듦) 기법으로 그린 이콘(예배용 초상)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장긍선 신부가 그린 성화 ‘평양교구 하느님의 종 24위’. 104×134cm. 목판에 전통 에그템페라(천연 안료와 달걀노른자를 섞어 색을 만듦) 기법으로 그린 이콘(예배용 초상)이다. 천주교 서울대교구 제공
“친구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요한복음 15장 13절)

프란치스코 교황이 최근 내놓은 ‘자의교서(自意敎書)’가 국내외에서 관심을 받고 있다. 자의교서란 1484년 인노첸시오 8세를 시작으로, 교황이 자신의 권위에 의거해 교회의 특별하고 긴급한 요구에 응하기 위해 작성하는 문서를 가리킨다. 프란치스코 교황도 주요 사안이 있을 때마다 자주 발표해왔다.

이번에 발표한 자의교서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유독 주목받는 이유가 뭘까. 교서 제목은 요한복음에서 따온 것으로, ‘타인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행위’를 새로운 시복시성(諡福諡聖·복자와 성인으로 추대)의 요건으로 추가했기 때문. 로이터통신은 “기존 기준이 정착된 지 400여 년 만”이라며 “가톨릭 전체 역사에서도 중요한 변화”라고 전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부소장인 조한건 신부에 따르면 원래 시복시성 단계는 △하느님의 종(Servi di Dio) △가경자(可敬者·공경할 만한 이) △복자 △성인 순. 이번 발표는 정확하게 따지면 ‘하느님의 종’에 오를 길이 늘어난 것이다. 기존 조건은 크게 2가지다. 첫 번째는 일반인도 친숙한 ‘순교자’. 김대건 신부(1821∼1846)처럼 한국에서 배출한 성인 103위와 복자 124위는 모두 여기에 해당한다.

두 번째는 ‘증거자’다. 덕행을 통해 신앙을 ‘증거(증명)’했다는 뜻이다. ①영웅적으로 덕행을 실천했거나 ②그에 걸맞은 ‘신성한 명성’을 지녀야 한다. 두 기준은 구분이 애매하나 지난해 성인에 오른 마더 테레사 수녀(1910∼1997)가 전자, 현 교황이 이름을 따온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1182∼1226)가 후자의 대표적 사례다.

키아라 코르벨라의 생전 모습. 항암치료를 받지 못해 오른쪽 눈까지 잃었지만 살포시 머금은 미소엔 아이를 향한 사랑이 깊게 배어 있다. 구글 이미지
키아라 코르벨라의 생전 모습. 항암치료를 받지 못해 오른쪽 눈까지 잃었지만 살포시 머금은 미소엔 아이를 향한 사랑이 깊게 배어 있다. 구글 이미지
그렇다면 앞으로 누가 시복될 가능성이 높아졌을까.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태아를 위해 항암치료를 거부하다가 출산 뒤 세상을 떠난 이탈리아 여성 키아라 코르벨라(1984∼2012)가 잘 들어맞는다”고 전했다. 한국에선 그간 국내 첫 증거자로 시복이 추진돼온 최양업 신부(1821∼1861)와 김범우 ‘토마스’(1751∼1787)에게 긍정적 영향을 끼칠 것으로 전망된다. 조 신부는 “지난해 가경자로 선포된 최 신부는 병사해 ‘땀의 순교자’라 불리고 고문 후유증으로 숨진 김범우는 한국 가톨릭의 첫 희생자”라며 “두 분 다 직접적 순교가 아니라 추진이 쉽지 않았는데 이번 발표로 전망이 밝아졌다”고 설명했다.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초상화. 마카오에서 김대건 신부와 신학 공부를 했던 최 신부는 헌신적인 사목 활동을 벌이다가 과로와 식중독으로 길에서 선종했다. 동아일보DB
가경자 최양업 신부의 초상화. 마카오에서 김대건 신부와 신학 공부를 했던 최 신부는 헌신적인 사목 활동을 벌이다가 과로와 식중독으로 길에서 선종했다. 동아일보DB
2015년 하느님의 종으로 선정된 ‘홍용호 주교와 80위’도 유력 후보다. 이들은 대부분 6·25전쟁 전후 북한 공산정권에 박해를 받다가 피살되거나 옥사 또는 병사했다. 서울대교구 이콘연구소장인 장긍선 신부는 “특히 자료가 부족해 순교 입증이 어려웠던 평양교구 24위는 신앙을 꿋꿋이 지키며 목숨을 희생한 성직자의 모범”이라고 평가했다.

가톨릭계에선 이번 발표가 지니는 함의도 잘 살펴야 한다고 당부했다. 시복시성 역시 결국은 시대적 가치가 반영되기 때문이다. 조 신부는 “누군가를 높은 반열에 올리기보단 현재를 살아가는 이들이 그들의 삶을 본받자는 의미가 더 크다”며 “과거처럼 순교자가 나오기 어려운 시대에 ‘타인을 위한 희생’ 역시 거룩한 그리스도의 가치임을 명확히 밝힌 것”이라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프란치스코 교황#자의교서#이보다 더 큰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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