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균 칼럼]죽으나 사나 대통령만 바라보는 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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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초 대통령 쏠린 국민 관심… 文, ‘만기친람 국정’ 밀어붙여
탕평 아닌 ‘코드인사’ 채웠지만 경청·수긍으로 김 빼는 능력
盧정권 실패 연구해 진화
聖君 세종에도 ‘임금 탓’했듯 임기말엔 ‘모든 게 대통령 탓’
의식구조 이젠 바꿔야 할 때

박제균 논설실장
박제균 논설실장
반기문은 유엔 사무총장이 된 뒤 개인차를 사려 했었다. 유엔에서 나오는 관용차는 있지만 사적인 일이나 부인 유순택 여사가 처리할 집안일에 쓸 요량이었다. 공과 사를 구분하는 오랜 관료생활의 자기관리가 몸에 뱄기 때문. 그런데 웬걸, 당장 유엔 경호팀에서 반대하더란다. “개인차는 안전을 보장할 수 없다. 정 개인차를 사고 싶으면 30만 달러(약 3억3500만 원)짜리 방탄차를 사라.”

결국 개인차를 포기한 반 전 총장이 철통경호에서 풀려난 것은 2월 1일 대선 출마 포기 선언 이후다. 지금도 요인 보호 차원에서 경찰 경호원이 있기는 하나 과거와는 비교가 안 된다. 2004년 외교통상부 장관이 돼 수행비서가 따라붙은 이후 올 1월까지 그에게 사생활이란 거의 없었다. “1980년 외무부 과장이 된 뒤 37년 만에 처음 부하 직원이 없는 삶에 적응하는 중”이라고 했다.

사생활이 없기는 한국 대통령도 결코 유엔 사무총장보다 덜하지 않을 것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처럼 비교적 사적인 시간을 많이 가졌던 대통령은 극히 예외적인 사례다. 더구나 임기 초 대통령에겐 온 국민의 눈과 귀가 쏠린다. 오죽하면 문재인 대통령이 트위터의 야당 비판 글에 ‘좋아요’를 누른 것이 정치적 논란으로 비화했을까. 문 대통령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처럼 트위터를 한다면 나라가 뒤집어질 것이다.


문 대통령은 자신에게 쏠린 국민적 관심을 무기로 다종·다양한 국정 어젠다를 밀어붙이고 있다. 취임하자마자 감사원에 4대강 정책감사 지시를 내렸는가 하면 비정규직의 정규직화, 최저임금, 탈(脫)원전, 반부패기관협의회 복원, 증세 등 하루가 멀다 하고 굵직한 이슈를 생산하고 관철시키려 한다. 대통령의 ‘올라운드 플레이’가 너무 두드러지는 바람에 대선 공약인 책임총리-책임장관제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문 대통령은 듣는다. 19일 야당 지도부와의 대화에서도 특유의 경청 능력이 돋보였다. 만기친람(萬機親覽)식 국정에도 거부감이 덜한 이유다. 상대편의 얘기를 경청하는 것만으로도 갈등 해결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는, 변호사 시절부터 터득한 지혜다. 필요하면 이견(異見)에 일단 수긍하는 방식으로 폭발성 있는 이슈의 김을 빼는 능력도 뛰어나다. 최저임금은 일단 1년 시행해보고 속도 조절 여부를 보겠다느니,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환경영향평가가 배치 번복을 위한 것은 아니라는 식이다.

문제는 문 대통령의 경청과 수긍이 입장 변화로 이어지는 일이 드물다는 점이다. 송영무 국방부 장관부터 탁현민 청와대 행정관까지 인사에 대한 숱한 비판이 야권은 물론 여당 내에서도 쏟아졌다. 그래도 대통령이 인사를 철회한 경우는 두서넛 손에 꼽을 정도다. 문 대통령은 대선주자 시절인 1월 펴낸 대담집 ‘대한민국이 묻는다’에서 자신과 다른 입장에 있는 사람들의 공격에는 “정말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런 스타일이 대통령이 돼서도 지속될까 봐 걱정이다.

문 대통령은 1기 내각 인선을 ‘대탕평’은커녕 ‘코드 인사’로 채워 넣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인사에 대한 국민적 반감은 크지 않다. 그것이 문 대통령의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내가 옳다’는 식으로 외치면서 인사와 정책을 밀어붙여 국민적 저항에 부닥쳤다. 문 대통령은 이견을 경청하고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해야 할 인사와 정책은 놓치지 않고 밀고 나간다. 노무현 정권의 실패를 연구해 노 정권보다 훨씬 진화한 것이다.

그러나 대통령이 앞장서는 국정운영 방식은 지지율이 높을 때나 가능하다. 일이 잘못되거나 지지율이 떨어지면 고스란히 ‘대통령 탓’으로 돌아갈 위험이 크다. 지금은 주홍글씨가 찍혀 있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도 임기 초에는 문 대통령 못지않게 빛났다. 이제는 박 전 대통령 주변을 둘러싸고 입에 담기조차 민망한 얘기들이 각종 매체에까지 등장할 정도다. 국정을 농단하고 권력을 사유화한 그를 두둔할 생각은 없다. 다만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던 사람을 얼마나 더 끌어내려야 속이 시원하겠는가. 임기 초 용비어천가를 부르던 사람들도 임기 말엔 ‘모든 게 대통령 탓’을 하는 세태다.

조선 세종 시절 자기 토지를 억울하게 뺏긴 조원이란 사람이 있었다. 관에 소송을 걸었으나 수령이 제대로 처리해주지 않았다. 분한 마음에 “지금 임금이 착하지 못해 이 따위를 수령으로 임명했다”고 소리쳤다. 임금을 욕한 죄는 사형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처벌하지 못하게 했다. 세종 같은 성군(聖君)도 ‘임금 탓’을 들었다. 매사에 대통령만 바라보는 우리의 의식구조. 그때보다 얼마나 진화했을까. 이제는 개헌이든 뭐든 바꿔야 할 때다.
 
박제균 논설실장 phark@donga.com
#문재인 대통령 코드 인사#대통령 탓#대통령만 바라보는 의식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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