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승훈 기자의 지금, 여기]“한국 원전기술 경쟁력-안전성 세계 1위… 한국인만 모른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7월 2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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前 과학기술처 장관 정근모

18일 한국전력국제원자력대학원대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난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 그는 “지난 광우병 사태에 이어 원전 건설 중단과 관련해 비과학적 담론이 횡행해도 이를 필터링해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21세기 기술융합시대에 맞는 교육이 부족한 측면이 크다”고 진단했다. 그는 “원자력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반인에게 핵분열과 핵융합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보면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라고 물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18일 한국전력국제원자력대학원대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난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 그는 “지난 광우병 사태에 이어 원전 건설 중단과 관련해 비과학적 담론이 횡행해도 이를 필터링해내지 못하는 것은 우리나라가 21세기 기술융합시대에 맞는 교육이 부족한 측면이 크다”고 진단했다. 그는 “원자력은 누구나 다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일반인에게 핵분열과 핵융합이 어떻게 다르냐고 물어보면 자신 있게 대답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라고 물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전승훈 기자
전승훈 기자
《 “한국의 원전은 안전성, 경제성 면에서 세계 1위입니다. 그런데 1등 국가가 갑자기 탈원전을 한다니 해외 전문가들에게서 ‘도대체 무슨 일이냐’고 전화와 이메일이 빗발치고 있습니다.” 국내 원자력계의 산증인인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78·KAIST 초빙 석좌교수)을 18일 한국전력국제원자력대학원대(KINGS)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났다. 그는 “원자력은 지난 30년간 한국을 세계 10위의 경제대국으로 성장시킨 ‘한강의 기적’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다”며 “향후 세계 600조 원 규모의 원전 시장에서 우리나라를 수십 년간 먹여 살릴 일자리 창출 산업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
 
―최근 미국을 방문했다.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원전 정책은 어떻게 되고 있는가.

“트럼프 정부는 원전에 적극적이다. 미국은 5기의 원전을 새로 짓고 있다. 또 1970년대 건설한 99기 중 80기 이상이 ‘설계수명 연장’ 상태다. 이 중 절반만 새로 짓는다고 해도 엄청난 원전 수요가 대기 중이다. 한국은 2009년 세계 발전 역사상 가장 큰 프로젝트인 아랍에미리트(UAE) 원전 프로젝트에서 최신형 원전 건설을 완벽하게 추진해 원전의 본고장인 미국, 영국에서도 한국형 원자로에 주목하고 있다.”

―미국에서 한국형 원자로에 대한 평가는….

“미국에서 원전을 건설하려면 원자력규제위원회(NRC)의 설계인증을 통과해야 한다. 프랑스의 아레바나 일본 미쓰비시가 신청했지만 NRC의 까다로운 심사를 통과하지 못해 지지부진한 상태다. 반면 ‘한국형 원자로’(APR1400)만이 NRC의 기술적인 질문 2300여 개를 완벽하게 통과했다. 내년 9월 최종 인증을 받을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에서 가장 까다로운 NRC의 인증을 앞둔 한국형 원자로가 바로 ‘신고리 5, 6호기’와 동일한 모형이다.”

―영국과도 수출 협상이 진행되고 있다는데….

美·英도 사로잡은 한국형 원전

“영국도 무어사이드에 23조 원 규모의 신규 원전 3기를 짓는데 한국형 원자로 도입을 협상 중이다. 건설 책임을 진 ‘뉴젠’ 컨소시엄의 최고경영자(CEO)가 바로 UAE에서 근무했던 영국인이다. 그는 한국형 경수로의 구조와 한국인의 기술 및 근면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영국이 신고리 5, 6호기 같은 경수로를 짓겠다고 나섰는데, 한국이 공사를 중단하겠다고 하니 당혹해하고 있다.”


정 전 장관은 23세 때 미국 미시간주립대에서 응용물리학 박사학위를 따고 프린스턴대 핵융합연구소, 매사추세츠공대(MIT) 핵공학과 연구교수 등을 지냈다. 1971년 KAIST의 전신인 한국과학원(KAIS) 설립을 주도했고 1990년과 1994∼96년 두 차례에 걸쳐 과학기술처 장관을 지냈다. 또 국제원자력기구(IAEA) 총회 의장, 국제위험통제협회 위원, UAE 원자력국제자문위원, 케냐 정부 에너지고문 등으로 활약해 온 세계 원자력계의 석학이다.

―우리나라의 UAE 원전 수주를 놓고 이명박(MB) 정권이 ‘덤핑 판매’로 따낸 것이라고 폄하하기도 했는데….

“정말 모르고 하는 소리다. 가격 깎아준다고 누가 원전 건설을 함부로 맡기겠는가. UAE가 한국형 경수로를 선택할 것이란 것은 2008년부터 이미 예상된 일이었다. UAE 정부의 원전기획 업무 자문을 담당한 미국의 라이트브리지 회사가 UAE 원전 타당성 연구조사를 벌였는데 한국밖에 선택할 여지가 없다는 결론이 났다. 한스 블릭스 전 IAEA 사무총장을 비롯한 UAE 정부의 국제자문위원단은 ‘이건 한국 것이다’라고 내게 미리 귀띔해줬다.”

그는 2009년 한국이 총 400억 달러(약 47조 원) 규모의 UAE 원자력발전소 프로젝트를 수주할 때 결정적 역할을 했다. UAE 정부의 원자력국제자문위원회에는 정 전 장관을 비롯해 블릭스 전 사무총장, 바버라 저지 전 영국 원자력공사 회장 등 국제 원자력계의 주요 인사가 총망라됐다. 정 전 장관은 “UAE 원전 국제입찰에서 프랑스의 니콜라 사르코지 당시 대통령은 무기 제공 의사까지 밝혔지만 끝내 한국을 이기지 못했다”며 “입찰 전부터 한국이 이기고 시작한 게임이었는데 우리 정부가 막판에 가격을 10% 깎아준 점이 솔직히 가장 억울하다”고 말했다.

―한국형 원자로가 세계 최고로 인정받는 비결은 무엇인가.

“지난해 신고리 3호기 상업운전 개시로 세계 최초로 3세대 원전 시대를 열었다. 프랑스도 ‘유러피안파워리액터(EPR)’라는 3세대 원전을 프랑스 플라망빌과 핀란드에서 짓고 있다. 그러나 공사 기간을 아직도 못 맞추고 있고 가격도 한국보다 두세 배 비싸다. 한마디로 기술경제성에서 우리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한국형이 제3세대라는 것은 무슨 뜻인가.

“원자력발전소에는 1세대, 2세대, 3세대가 있다. 세대를 나누는 핵심은 ‘안전기술’이다. 한국형은 최신 안전기술을 종합적으로 반영한 3세대 원전이다. 요즘엔 핵연료에서 발생한 열을 물로 냉각시키지만 1세대 원전은 가스로 냉각시켰다. 1986년 소련에서 방사능 누출 사고가 난 체르노빌 원전은 방사능 누출을 막기 위한 콘크리트 격납고도 없었다. 체르노빌 사고 직후 IAEA가 세계 11명의 전문가를 위촉해 ‘원자력안전자문위원회’를 만들어 원자력 안전 시스템을 강화했다. 나도 위원으로 8년간 활동했다.”

지진에 가장 안전한 곳은 원전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국내 원전에 대한 공포심도 커졌는데….

“후쿠시마 원전은 우리 원전과 다르다. 후쿠시마는 핵연료를 냉각수로 식히면서 발생하는 수증기로 직접 터빈을 돌리는 ‘비등형 경수로’다. 수증기에 방사능 물질이 포함돼 터빈까지 내부가 오염되는 정도가 높다. 반면 우리나라 원전은 냉각수에 압력을 가해 물이 끓지 못하게 만드는 ‘가압형 경수로’다. 대신 뜨거워진 냉각수를 제2의 공간으로 뽑아내 수증기 발생기로 수증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터빈이 방사능에 오염되지 않는 등 안전성을 크게 높였다.”

―경주 지진 이후 신고리 5, 6호기 건설에 대한 우려가 나왔다.

“신라 수도 경주는 1500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다. 경주에 크고 작은 지진이 발생해 왔지만 첨성대, 석굴암, 불국사가 무너진 적은 없다. 원전 설계의 핵심은 내진설계다. 첨성대가 무너질 정도의 지진이 오더라도 원전은 끄떡없다. 지난 경주 지진이 리히터 규모 5.8이었다. 신고리 3호기부터 한국형 원자로의 내진설계는 7.0까지 견딜 수 있다.”

―문재인 대통령은 연설에서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로 1368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언급했는데….

“지진 때문에 원전 사고가 발생한 것이 아니다. 지진해일(쓰나미)로 피난 가서 열악한 환경에서 살다가 죽은 사람들을 다 합친 숫자다. 1960년대 후쿠시마 발전소는 6.5m 이상 쓰나미를 대비해 건설됐다. 방파제 높이가 5m만 더 높았어도 괜찮았을 것이다. 당시 후쿠시마 인근 오나가와 원전은 방파제가 높아 아무런 피해가 없었다. 오히려 지진이 나자 강력한 내진설계가 돼 있는 원전 건물로 사람들을 대피시켰다.”

―정부는 3개월간의 공론조사 후 시민배심원단이 신고리 5, 6호기 공사 중단 여부를 결정하게 하겠다고 발표했는데….

“일반인이 세계 에너지 산업 현황에 대한 기술적 이슈, 경제적 이슈를 파악하려면 석 달이 아니라 3년도 힘들다. 독일이 탈원전을 결정하는 데 20년이 걸렸고, 스위스는 30년에 걸쳐서 의논한 다음 국민투표로 결정했다. 그들이 바보라서 그렇게 오래 걸렸겠는가? 또 시민배심원단에 전문가를 배제한다는데, 전문가도 사회 구성원인데 왜 배제하나? 21세기 과학기술 문명 시대에는 전문성을 인정해 주는 사회가 선진국이다.”

그의 연구실에는 1959년 국내 최초의 실험원자로 기공식 때 이승만 초대 대통령과 김법린 원자력원 원장이 함께 있는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는 “당시 원자력원장의 보좌역으로 일하던 저도 뒷줄 어딘가에 서 있었다”고 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이 원자력발전을 시작한 이유는….

“우리나라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 당시부터 ‘과학기술 입국’을 내걸었다. 6·25전쟁으로 폐허가 된 상황에서 두뇌자원밖에 기댈 곳이 없었다. 그 핵심이 원자력이었다. 1957년 유엔 산하에 IAEA가 발족했을 때 한국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는데도 IAEA 창립 회원국이 됐다. 미래를 향한 꿈을 꾼 것이다.”

―원자력이 한국 경제에 미친 영향은….


“고리 1호기는 1970년대 말 오일쇼크 이후 한국 경제의 대들보 역할을 했다. 1978년 원전 상업운전이 시작된 이래 우리나라는 올해 2월 ‘원전 누적 운전 500년’을 달성했다. 같은 양의 전력을 화력발전으로 생산했을 경우에 비해 303조4000억 원을 절약하고 22억 t의 온실가스 배출을 감축할 수 있었다.”

산전국(産電國) 꿈꾸는 초일류 국가

―우리나라의 인공태양으로 불리는 ‘핵융합’ 기술은 어디까지 왔나.


“한국은 핵융합 기술에서도 선두를 달리고 있다. 우리는 2007년부터 ‘초전도핵융합연구장치(KSTAR)’를 운영하고 있다. 2040년대 상용화가 목표다. 현재 프랑스 카다라슈에서 한국을 비롯해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중국 러시아 인도 등 7개국이 세계 최대 국제핵융합실험로(ITER)를 건설 중이다. 이 프로젝트의 핵심 포스트는 한국인이고, 우리가 수출하는 부품도 6000억 원이 넘는다. 우리의 기술을 한국인만 모르고 있다.”

그는 아프리카 케냐 정부의 에너지 고문도 맡고 있다. 그가 설립에 관여한 국제원자력대학원대에서 공부하고 있는 케냐인이 30명이 넘는다.

―원자력발전과 일자리 창출의 관계는….

“우리나라의 교육 수준이 이렇게 높은데 고급 일자리가 있어야 한다. 공무원 일자리 많이 늘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나는 10년 전부터 ‘한국이 초일류 국가가 되려면 산유국이 아닌 산전국이 돼야 한다’고 말해 왔다. 세계로 나아가서 원자력발전, 신재생에너지를 통해 전기를 생산하는 나라가 돼야 한다.”

그는 인터뷰를 마치며 “한국처럼 원자력 기술을 깨친 인력을 키우는 것은 아무 나라나 못 한다”면서 신중한 결정을 당부했다. “세계에서 600조 원의 원자력발전 시장이 열리고 있다. 미국과 영국, 아프리카에 세계 최고의 한국형 원전을 공급할 절호의 기회가 왔다. 여기서 원전 가동을 중단하면 연구 인력과 산업 생태계가 다 무너진다. 정말 경솔하게 다루지 말아 달라.”
 
전승훈 기자 raphy@donga.com
#정근모 전 과학기술처 장관#한국 원전기술#한국형 원자로#한국 핵융합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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