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전성철]‘살인마’의 편지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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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성철 사회부 차장
전성철 사회부 차장
2007년 12월 25일 경기 안양시에서 초등학생 우예슬(당시 8세), 이혜진 양(당시 10세)을 성추행하고 살해한 정성현 씨(48). 그는 2009년 2월 대법원에서 두 어린이를 포함해 총 3명의 부녀자를 죽인 혐의로 사형이 확정됐다. 하지만 이후 단 한 차례도 사형 집행이 이뤄지지 않은 까닭에 정 씨는 여전히 서울구치소 수인번호 ‘2013번’으로 숨쉬고 있다.

정 씨는 최근 동아일보사로 노란 봉투에 담긴 등기우편을 보내왔다. ‘민원서류’라는 제목의 손 편지에서 그는 본보 2014년 3월 5일자 사회면에 실린 기사를 인터넷에서 삭제하라고 요구했다.

피해자 이혜진 양의 아버지 이창근 씨(당시 53세) 부음 기사였다. 기사에 따르면 이 씨는 딸을 잃은 뒤 10년간 일하던 직장을 그만뒀다. 또 6년이 넘는 시간을 술에 의지하며 보냈다. 그 결과 말년에는 간경화 등 병마에 시달렸다. 사건이 일어난 후 다른 동네로 이사를 했지만 “딸이 그립다”며 끝내 안양을 떠나지 못했던 이 씨. 그는 자택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숨을 거둔 채 발견됐다.

해당 기사에는 물론 정 씨의 범행 내용이 포함돼 있다. 정 씨는 우선 자신의 실명이 기사에 적시된 점을 문제 삼았다. 본보 등 국내 언론은 정 씨처럼 반인륜적 범죄자는, 수사 단계에서 범행을 자백하거나 일정 수준 이상으로 혐의가 확인되면 실명을 밝혀 왔다. 법원도 이런 보도관행을 특별히 문제 삼은 적이 없다. 정 씨 사건 역시 수사·재판 중 숱한 실명 보도가 나왔다.

본인의 실명 공개를 새삼 문제 삼으며 정 씨가 제시한 근거 중 하나는 1심 재판부가 선고 당일 ‘신상정보 열람제공 명령은 내리지 않는다’고 언급한 공판조서였다. 법원은 통상 성 범죄자에 대해 출소 이후 재범 예방 및 억제를 위해 신상정보 공개를 명령한다. 정 씨에게 이를 명령하지 않은 것은 사형을 선고했기 때문이다. 출소할 일이 없으니 정보 공개 필요성도 없다는 취지다. 정 씨의 주장은 어이없는 견강부회인 셈이다.


더 기막힌 궤변은 그 다음이다. 해당 기사에서 본인을 ‘살인마’라고 표현한 것이 위법하다는 것이다. 정 씨는 “본인은 피해자를 살해할 의도가 없었고 판결 또한 ‘처음부터 의도나 계획을 갖고 이루어진 범행으로 밝혀지지 않았다’고 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왜 본인에게 사실 확인도 없이 부당하게 모욕을 하느냐. 이는 독자들로 하여금 사실을 오인하게 할 수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또 “이에 반대되는 증명이 있으면 제시하고 설명해보라. 언론사가 풍문이나 전하는 곳이 아니다”라고 훈계까지 했다.

법원이 인정한 죄목이 ‘살인’이 아니라 ‘상해치사’라는 게 정 씨 주장의 근거다. 그러나 이는 거짓말이다. 정 씨의 판결문상 죄명은 분명히 ‘강제추행살인’이다. 법원이 ‘살인’이 아니라 ‘상해치사’로 본 내용은 정 씨가 2004년 7월 경기 군포시에서 또 다른 여성(당시 44세)을 주먹으로 수십 차례 때려 숨지게 한 사건이다.

사형은 국가가 범죄 피해자와 그 가족을 대신해 가해자의 목숨을 빼앗겠다는 약속이다. 그 무게감이 크기에 판사들은 쉽게 사형선고를 하지 않는다. 한 법관은 “사형선고를 할 때는 ‘내가 직접 그 사람을 죽여야 한다면 그렇게 하겠느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본다”고 말했다. 사형 집행을 정당한 이유 없이 유예하는 것은 국가가 약속을 어기는 일이다.

정 씨는 2008년 3월 검거된 이후 9년 4개월째 구치소에서 우리가 낸 세금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가 천수를 누리는 동안 쓸쓸하게 숨진 이창근 씨처럼, 범죄 피해자 가족의 속은 시커멓게 썩고 있다. 새 법무부 장관이 고민해야 할 문제다.
 
전성철 사회부 차장 dawn@donga.com
#살인마의 편지#정성현#서울구치소 수인번호 2013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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