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에서/이동영]배 아프거나 배부른 나라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6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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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거스 히딩크 감독은 “나는 아직 배가 고프다”라고 했다. 2002년 월드컵 8강전에서 스페인을 꺾고 4강 진출을 확정한 직후의 일이다. 한국은 경험도, 상상도 해보지 못한 성과였다. 한국민은 예선 통과만으로 배가 불렀지만 외국인 감독의 사전에 포만감이란 단어는 없는 듯했다. 절실한 배고픔이 있어야 놀라운 결과물을 얻을 수 있다는 세상 이치와 맥이 닿는 듯하다.

공교육 정상화를 위해 자사고나 외고를 폐지하겠다는 교육 당국의 방침을 들으니 ‘한국 교육은 배가 고플까?’라는 의문이 들었다. 더 큰 목표를 위해 좀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겠다는 학생과 학부모의 배고픔을 깡그리 짓밟는 일이기 때문이다. 한쪽은 미래를 향해 배고픔을 외치며 제 갈 길을 가겠다는데 교육 당국과 적지 않은 사람은 이런 배고픔이 잘못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자세는 배아픔과 다르지 않다. 이재정 경기도교육감도 말했다. “폐지 이유요? 95%가 찬성합니다. 반대는 5%뿐이에요.” 전국 2353개 고교 중 폐지 대상으로 언급되는 자사고 외고 국제고는 3.5%인 84개교다.

그는 자사고인 경기 안산의 동산고를 사례로 들었다. 이 학교 재학생 중 안산지역 학생은 15%뿐이고 나머지는 타 지역 출신이라고 한다. 집 근처에 이 학교를 두고도 가지 못한 절대 다수의 학생이 ‘저 학교는 1류, 나는 2류 학교에 다닌다’는 박탈감에 시달린다고 했다.

이런 논리라면 평균보다 우수한 환경을 갖추고 좋은 입시 결과를 내는 학교는 문을 닫아야 하지 않나. 단순히 나보다 뛰어난 사람이 있기 때문에 박탈감을 느낀다면 그건 배아픔이다. 실제 존재하는 격차와 상관없는 이유 때문에 차별을 받는다면 모를까 우리 회사보다 돈 잘 버는 회사, 우리 학교보다 공부 잘 시키는 학교, 우리 팀보다 경기 잘하는 프로팀이 나오는 족족 문 닫게 하는 게 정상인가.

현재 대학 입시를 놓고 보면 외고나 자사고보다 일반고에 다니는 게 유리한 면이 적지 않다. 실제 외고 자사고 가기에 충분한 실력인데 일반고에 가는 학생이 꽤 있다. 하지만 내신에서 불리하고 엄청난 경쟁 스트레스가 수반되는데도 그 길을 고른 데에는 일반고의 처참한 현실이 있다는 걸 우리는 다 안다. 누구보다 잘 알 텐데 교육 당국에서 이런 문제를 고치겠다는 배고픔은 찾아볼 길 없다. 오히려 배아픔을 부추기며 자신이 가슴으로 안고 있어야 할 공교육 개혁이란 배고픔을 저 뒤로 숨기고 모른 체한다.

모두가 명문고에 다니지 못하는 현실을 만들어 배아픔을 없애는 게 나은지, 각자에게 맞는 꿈을 키우도록 일반고 자체 역량을 끌어올리는 게 필요한지 깊게 생각할 때다.

다른 분야보다 유독 교육에서 배아픔이 두드러진다. 남이 좋은 평가를 받게 되면 내가 뒤처지고 결국 입시라는 최종 관문에서 걸려 넘어진다고 보는 탓이다. 그러니 공부 잘하는 학생에게 공개적으로 상장 주는 일이 사라졌고, 교사가 특정 학생을 칭찬해 다른 학생이 박수를 보내게 하는 일도 찾아보기 어렵다. 공부만 잘하면 온갖 특혜를 받는 학교 운영은 당연히 문제지만 그렇다고 우수한 학생을 제대로 평가해주지 못하는 시스템도 정상은 아니다.

이제 배고픔도 찾아보기 힘들다. 상장도 박수도 보내주기 어려운 여건이니 열정 가진 교사가 나오기를 기대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내 자식은 다 컸으니 자사고를 없애든 말든 관심 두지 않는 배부른 학부모가 많다. 무언가에 도전하고 더 배우고 싶다는 배고픔 자체를 잊은 탓에 꿈이 뭔지 모른다는 학생이 수두룩하다. 한쪽은 배가 아프고 다른 한쪽은 배가 불러 역동성을 잃었으니 이 나라 교육에 미래가 있겠나.
 
이동영 정책사회부 차장 argus@donga.com
#명문고#대학 입시#안산 동산고#외고 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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