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기획]서열 안 따지는 토론 모임… “법원행정처 개혁” 줄기차게 주장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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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 사법개혁 진원 ‘국제인권법연구회’]
2011년 발족한 정식 학술모임 회원 500명… 전체 법관의 17% 가입, 진보 성향 강한 우리법연구회나 주류 엘리트 중심 민판연과 달리 자유롭게 어울리며 법원개혁 고민

“사법개혁 법관 주도로 이뤄져야”… ‘행정처, 출세 코스로 변질’ 인식
고법 부장판사 승진제도 폐지 주장… 간사 김형연 판사 靑비서관 발탁에 일각 “靑 하명 개혁 시도될라” 우려
6월 19일 전국 법관 대표회의

양승태 대법원장(오른쪽)이 지난해 9월 ‘정운호 게이트’에 부장판사가 연루된 사건이 불거진 직후 전국법원장회의를 연 뒤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올 3월 법원행정처의 법관 학술모임 축소 외압 사건으로 다시 전국법원장회의를 열었고 판사들이 요구한 
‘전국법관대표회의’(6월 19일)를 수용했다. 동아일보DB
양승태 대법원장(오른쪽)이 지난해 9월 ‘정운호 게이트’에 부장판사가 연루된 사건이 불거진 직후 전국법원장회의를 연 뒤 회의장을 나서고 있다. 올 3월 법원행정처의 법관 학술모임 축소 외압 사건으로 다시 전국법원장회의를 열었고 판사들이 요구한 ‘전국법관대표회의’(6월 19일)를 수용했다. 동아일보DB

사법부의 중추, 인사와 예산과 정책을 총괄하는 대법원 법원행정처가 흔들리고 있다. 법원 내 최대 학술모임 ‘국제인권법연구회’의 학술행사를 축소하려고 압박한 사실이 드러난 게 단초가 됐다. 법원행정처의 중앙집권적 의사 결정에 불만을 갖고 있던 많은 판사들이 결집하기 시작한 것. 특히 문재인 대통령이 인권법연구회 간사를 지낸 김형연 전 인천지법 부장판사(51)를 대통령법무비서관에 기용하자 법원 안팎에선 법원행정처를 사법 개혁의 타깃으로 기정사실화하고 있다.

그 여파로 고영한 법원행정처장이 23일 자리에서 물러났다. 또 양승태 대법원장은 서울중앙지법 등 전국에서 잇따라 열린 판사회의 요구를 받아들여 6월 19일 사법연수원에서 판사 101명이 참석하는 ‘전국 법관 대표회의’를 열도록 했다. 앞서 22일에는 법원 노조(전국공무원노조 법원 본부)가 대법원을 항의 방문해 “신임을 잃은 양 대법원장은 대법관 임명 절차에 관여하지 말고 스스로 사퇴하라”고 요구했다.

○ 30, 40대 소장 판사들이 핵심

2011년 8월 대법원으로부터 설립 허가를 받은 인권법연구회는 주류 엘리트 법관 중심의 ‘민사판례연구회’나 진보 성향 법관 모임인 ‘우리법연구회’와 여러 면에서 다르다. 가장 큰 차이점은 대법원이 후원하는 정식 학술모임이라 현직 법관 누구나 자유롭게 가입과 탈퇴를 할 수 있는 느슨한 조직이라는 것. 이 모임에는 전국 법관 3000여 명의 17%가량인 500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이 가운데 활발하게 모임 활동을 하는 판사는 수십 명이다.

뚜렷한 수장이 없는 것도 차이점이다. 우리법연구회는 1988년 김용철 당시 대법원장 연임에 반대하며 일어난 이른바 ‘2차 사법파동’의 주역 한기택 전 부장판사(2005년 별세)처럼 모임을 이끈 리더가 있었다. 반면 인권법연구회는 현직 고법 부장판사가 번갈아 회장을 맡지만 이들은 중고등학교 교내 동아리 지도교사처럼 명목상 대표일 뿐 실제 모임을 주도하지는 않는다.

또 다른 큰 특징은 모든 회원이 회장은 물론이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문화다. 회식이나 공식 학술모임에서 부장판사와 갓 임관한 초임 판사가 ‘계급장 떼고’ 난상토론을 벌이는 식이다. 부장판사와 맞담배는 기본이고, 선배 판사들이 많은 자리에서 막내 판사가 법원과 선배들에 대한 불만을 자유롭게 털어놓는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인권법연구회에선 30, 40대 젊은 법관들 중심의 소모임 활동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난민법 소모임’, ‘표현의 자유 소모임’, ‘외롭지만 쑥스러운 사람들의 모임’ 등이다. 법원행정처의 학술행사 축소 외압은 이들 모임 중 하나인 ‘인권보장을 위한 사법제도 소모임’ 주도로 공론화됐다.

인권법연구회에 참여하고 있는 한 판사는 “자유롭게 얘기할 기회가 주어지면 우리 공장(법원)이 잘하는 일보다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게 당연한 일 아니냐”고 말했다. 자유로운 토론 문화가 자연스럽게 법원 개혁 문제 제기로 이어졌다는 것이다.

○ ‘법원행정처 권한 축소’가 화두

법원 내부에서는 인권법연구회가 노무현 정부 시절 사법부의 실세로 떠올라 보수 진영의 공격을 받았던 우리법연구회의 전철을 밟는 것 아니냐는 예상이 나오고 있다. 청와대가 인권법연구회 간사를 지낸 김 법무비서관을 통해 인권법연구회와 손발을 맞춰 사법 개혁을 추진할 가능성이 높다는 것.

하지만 인권법연구회 안팎에서는 김 비서관의 청와대 직행을 비판하는 의견이 많다. 일선 법원의 임관 11년차 판사는 “현직 검사의 청와대 파견을 중단한 마당에 현직 판사가 청와대로 직행한 것은 문제”라며 “사법 개혁은 전적으로 법관들 주도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인권법연구회 회원인 한 법관은 “사법 개혁을 빌미로 인권법연구회 출신으로 법원행정처를 채우려 든다면 그것은 개혁이 아닌 개악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법원 내부에서는 인권법연구회 핵심 멤버들의 행보와는 별개로 그간 인권법연구회가 제기한 문제들이 사법 개혁의 화두가 될 것이라는 점에 대체로 동의한다. 또 그 첫 단계가 법원행정처의 힘을 빼는 일이 될 가능성이 크다는 데 이견이 거의 없다. 엘리트 법관들의 출세 코스가 된 법원행정처를 일선 법원을 지원하는 조직으로 돌려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각 법관이 인사권을 쥔 법원행정처 간부들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법 부장판사 승진 제도 폐지는 인권법연구회 등이 오랫동안 제기해온 문제다. 3월 25일 인권법연구회가 개최한 학술대회에서 김영훈 서울고법 판사(43·30기)는 “고법 부장 승진 제도를 없애고 고법과 지법에서 근무하는 판사 간에 차이가 없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법원장이 법원행정처를 통해 고법 부장 승진 인사를 하지 않아야 일선 법관들이 윗선의 눈치를 안 보고 재판을 할 수 있다는 논리다.

배석준 기자 eulius@donga.com
#법원행정처#서열#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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