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박정자]텔렘 수도원 잔상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5월 19일 03시 00분


코멘트

한점 흠 없는 선남선녀들… 마음껏 행동하게 허락됐지만
자유의지 잃은 옛 수도원 우화… 文대통령과 보좌진들의 테이크아웃 커피 산책에서 엿보였다면 과민한 탓일까
청와대 인사들 ‘외모 패권’에 환호하는 젊은 여성들처럼 말단 보다가 본질 놓쳐서야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문재인 대통령 취임 첫날의 커피 산책이 화제였다. 신임 수석비서관들과 대통령이 하나같이 순백색의 와이셔츠에 넥타이 차림을 하고, 한 손엔 테이크아웃 커피 잔, 다른 쪽 팔에는 양복저고리를 걸쳐 든 채 청와대 경내 초록 숲을 배경으로 웃으며 걷고 있었다. 이것이야말로 박근혜 정부 시절 검정 양복 차림 비서관들의 획일성과 비교되는 탈권위라고 누리꾼들이 입을 모았다. 미국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표절했느냐는 비아냥거림도 있었지만, 나는 어쩐지 텔렘 수도원이 연상되었다.

텔렘 수도원은 르네상스 시대 프랑스 문학을 대표하는 프랑수아 라블레의 소설 ‘가르강튀아’에 나오는 가상의 수도원이다. 흔히 수도원이라면 ‘노트르담의 꼽추’의 콰지모도처럼 애꾸 절름발이 꼽추 배냇병신 등 추한 외모의 남자나 여자들이 들어가는 곳인데, 방이 9000개가 넘는 거대한 텔렘 수도원은 특이하게도 얼굴이 아름답고 몸매가 좋으며 훌륭한 성품을 가진 선남선녀들만 선택적으로 받아들였다.

더구나 이들은 모두 좋은 가정에서 태어나 양질의 교육을 받고 고상한 사교계에서 지내던 자유인들이었으므로, 완전히 자유의지에 맡겨 놓아도 결코 잘못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이곳의 유일한 규칙은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였다. 먹고 싶을 때 먹었고, 일하고 싶을 때 일했으며, 잠자고 싶을 때 잠잤다. 아무도 그들에게 무슨 일을 하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들은 최고의 선한 의지를 가진 한 사람, 즉 수도원장이 “마시자”고 하면 모두 같이 마셨고, “들판에 나가 즐기자”고 하면 모두 같이 나가 놀았다. 아니, 자유의지라더니! 규칙을 충실하게 지키면 오히려 규칙을 위배하게 되는 논리적 패러독스다.


텔렘 수도원의 경우, 원생들 상호 간에는 물론 아무런 의무가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최고의 지도자 한 사람, 다시 말해 ‘만인의 의지’를 대변하는 한 사람에게는 철저하게 복종할 의무가 있었다. 자기들끼리는 동등하지만, 자신들을 동등하게 만들어준 그 사람과는 결코 동등할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하라. 단 너에게 명령을 내리는 자에게는 반항하지 말라.” 이것이 텔렘 우화의 본질이다. 앙드레 글뤽스만 같은 보수주의 철학자들은 이 우화에서 사회주의 사상의 본질을 간파한다.

‘구체제’건 ‘적폐’건 어떤 명칭을 내세우건 간에 모든 사회주의 사상은 언제나 기존 체제, 기성세대, 하여튼 모든 것에 반항하라고 가르친다. 그리고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주장한다. 이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자면 사회주의 사상 그 자체까지도 의심하고 비판하고 반항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텔렘 수도원의 역설처럼 사회주의자들은 높은 곳의 한 사람에 대한 ‘평등’은 유보한 채 평등을 말하고, 자신들에 대한 비판은 원초적으로 차단한 채 다른 모든 것을 비판한다.

“우리 양복저고리 벗어 들고 와이셔츠 차림으로 산책하며 커피 드십시다”라고 대통령이 말했을 때 좌중의 모두가 기꺼이 같은 옷차림으로 나가 웃음 띤 얼굴로 카메라 앞에서 역동적으로 걸었다고 하자. 그렇다면 이것이 텔렘 수도원, 가까이는 이전 정부의 검정 양복 획일성과 본질적으로 차이가 나는 것일까?

잘생기고 집안 좋은 선남선녀만 거주자로 받아들였다는 텔렘 수도원의 기준 역시 사회주의 또는 전체주의 체제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사회주의는 사회적 약자 또는 소수자 배려를 최고의 가치로 내세우지만 실은 건강하고 잘생긴 좋은 집안 출신만을 국민으로 인정하는 냉혹한 체제로 타락했다. 북한 체제가 그것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평양에는 장애인이 들어올 수 없고, 모든 지배층은 당성이 좋은 집안 출신이어야 하며, 최고지도자는 백두혈통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20, 30대 여성들 사이에서는 지금 문 대통령과 임종석 비서실장, 조국 민정수석 등이 잘생겼고 경호원까지 꽃미남이라고 난리가 났다. 이것이 바로 ‘증세 없는 안구 복지’이고 ‘외모 패권주의’라고도 했다. 선거 유세장에는 “얼굴이 복지다”라는 피켓도 등장했었다. “우리 이니 하고 싶은 거 다해”라는 유아적 코맹맹이 소리는 아마도 역사에 길이 남을 반지성적 선거 언어의 사례가 될 것이다.

박정자 객원논설위원 상명대 명예교수
#문재인 대통령#텔렘 수도원#적폐청산#반지성적 선거 언어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