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낮부터 도심공원 점령한 ‘길맥족’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4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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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주 무법지대’ 한국, 이젠 바꾸자]<상> 국민안전 지킬 금주규범 절실

25일 오후 4시경 서울 마포구 경의선 숲길 공원에서 젊은 남녀 4명이 ‘길맥’을 즐기고 있다.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3번 
출구와 맞닿은 공원 입구부터 약 200m까지가 대표적인 길맥 거리로 주말 밤이면 술을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
25일 오후 4시경 서울 마포구 경의선 숲길 공원에서 젊은 남녀 4명이 ‘길맥’을 즐기고 있다. 지하철 2호선 홍대입구역 3번 출구와 맞닿은 공원 입구부터 약 200m까지가 대표적인 길맥 거리로 주말 밤이면 술을 마시는 사람들로 가득 찬다.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

“내가 사올게.”

25일 오후 4시경 서울 시내 대표적인 ‘길맥(길거리에서 마시는 맥주)’ 장소인 마포구 경의선 숲길 공원을 찾았다. 젊은 남녀 4명이 공원 벤치를 테이블 삼아 음주를 즐기고 있었다. 술이 떨어지자 한 여성이 일어나 바로 옆 가게에서 맥주를 사왔다. 술자리는 2시간 정도 이어졌고 결국 한 명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평일 대낮인데도 공원에서 술을 마시는 사람은 20명이 넘었다. 때마침 유치원 하원 시간이라 공원에는 아이들이 뛰놀고 있었지만 아무도 이 어린아이들을 신경 쓰지 않았다.

밤이 되자 공원 벤치는 ‘길맥족’으로 가득 찼다. 잔디밭에 돗자리를 깔고 술을 마시는 무리도 있었다. 공원 관계자는 “평일이라 그래도 술 마시는 사람이 적은 편”이라며 “날씨가 더 따뜻해지면 주말 밤은 아예 음주 인파로 잔디밭이 가득 찬다”고 말했다. 마포구 연남동과 동교동에 걸쳐 있는 이 공원은 미국 뉴욕 센트럴파크에 빗대 ‘연트럴 파크’로 불린다. 음주는 물론이고 술을 들고 다니는 것조차 불법인 센트럴파크가 한국에 와서 술 먹는 공원의 불명예를 쓰고 있는 셈이다.


○ 술 마시기 좋은 나라 한국

날씨가 따뜻해지는 요즘이면 전국 어느 공원에서나 술 마시는 사람을 볼 수 있다. 공원에서 담배를 피우거나 반려견 배설물을 치우지 않고 목줄을 채우지 않으면 5만∼10만 원 과태료가 부과되지만 음주는 단속도 처벌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전국 2만1766개 공원 중 금주구역으로 지정된 공원은 단 7곳에 지나지 않는다. 이마저도 처벌 근거가 없어 실효성은 없다. 한국에서는 미성년자에게 술만 안 팔지 언제 어디서나 음주가 가능하다. 공원은 물론이고 병원, 학교, 어린이집에서 술을 마셔도 처벌받지 않는다. 술값(소주 최저가 1060원)은 수입 생수 가격 수준으로 저렴하다. 외국인들이 한국을 술 마시기 좋은 나라로 꼽는 이유다.

한국인 1인당 알코올 소비량(2014년 기준)은 9L로 수년째 정체 상태다. 단순 알코올 소비량만 보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8.9L) 수준이다. 문제는 음주에 대한 규제는 물론이고 최소한의 질서 의식이 없다 보니 무절제한 음주가 비일비재하다는 데 있다.

매년 봄이면 음주 사고가 끊이지 않는 대학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은 여전히 술잔치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올해 초 금오공대 총학생회는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에 쓸 술 8760병을 구입했다가 여론의 뭇매를 맞았다.

○ 국민 안전 위협하는 음주, 규제는 사실상 전무


전문가들은 음주가 개인과 사회에 미치는 폐해가 흡연 못지않게 크다고 입을 모은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건강보험정책연구원에 따르면 음주로 인한 질환 치료비와 생산성 손실액 등을 합친 사회적 비용은 9조4524억 원(2013년 기준)으로 2005년(6조501억 원)의 약 1.6배로 늘었다. 음주로 인한 질환으로 하루 평균 13명이 사망한다.

술은 각종 사고나 범죄를 유발하는 촉매 역할을 한다. 2015년 발생한 교통사고 10건 중 1건이 음주운전으로 인한 교통사고였다. 연간 약 5000명이 목숨을 잃었고 35만여 명이 다쳤다.

20일 경기 시흥시 모 고교 앞 등굣길에서 한 40대 남성이 흉기 난동을 부리다 경찰에 붙잡혔다. 하마터면 큰 인명 피해로 이어질 뻔한 상황이었다. 이때도 술이 문제였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살인 사건 범죄자의 34.9%, 강간 범죄자의 30.4%, 방화 범죄자의 45.4%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다. 자살 사망자의 39.7%도 술을 마신 뒤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제갈정 인제대 보건대학원 교수는 “담배만 간접 피해가 있는 게 아니다. 음주는 불특정 다수의 생명을 한순간에 뺏을 수 있기 때문에 국민 안전에 더 큰 위협”이라며 “그동안 전무했던 음주 규범을 하나씩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호경 기자 kimhk@donga.com
#음주#길맥족#금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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