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정민의 핫 피플] 김정남 사건의 수혜자(?) 라작 말레이 총리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3월 10일 09시 44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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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남 암살 사건 이후 비자면제 협정 파기, 대사 추방, 말레이시아 내 북한인 출국금지 등 강경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는 말레이시아 정부. 그 뒤에는 “북한의 끔찍한 인질외교가 모든 국제법과 외교 규범을 완전히 무시하고 있다”고 일갈하는 나집 라작 말레이시아 총리(64)가 있다.

“김정남 암살 수사와 관련해 (북한의) 어떤 압박이나 협박도 받지 않겠다”고 강조하는 라작 총리. 하지만 말레이 야당과 반정부 인사들은 “라작 총리가 자신의 끊이지 않는 부패 스캔들을 무마하는데 김정남 사건을 십분 이용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공정하고 철저한 수사를 하는 듯한 모습을 보여 자신에게 드리워진 비리 의혹을 씻으려 할 뿐 아니라 ‘북한’이라는 외부의 적에게 화살을 돌려 국민 지지를 호소하는 전략을 쓰고 있다는 의미다.

2009년 집권한 그는 국영회사 말레이시아개발유한공사(1MDB) 자금 횡령설, 사우디아라비아 왕가와의 금권유착설 등 각종 비리 의혹의 한가운데에 있다. 자신을 최고 권좌로 밀어준 마하티르 모하맛 전 총리로부터도 “총리감이 아니다. 그를 몰아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수시로 대규모 퇴진 시위에 직면할 정도로 지지 기반이 취약하다. 그는 어떤 인물이고 왜 이런 상황에 놓였을까.


▲ 북한의 행동을 규탄하는 라작 총리

○정치적 금수저

라작 총리는 1953년 말레이시아 중부 파항 주 쿠알라리피스에서 말레이시아 2대 총리 압둘 라작(1922~1976)의 6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말레이시아는 영국 식민지였고 아버지 압둘은 파항 주의 패기 넘치는 젊은 정치인이었다.

1957년 독립 후 부친이 초대 부총리, 총리 등으로 승승장구하면서 라작 총리도 전형적인 엘리트의 삶을 산다.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영국 유학을 떠나 노팅엄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고 귀국 후 은행과 석유회사 등에서 일했다.

1976년 총리로 재직 중이던 부친이 영국에서 갑자기 사망했다. 장남이었던 그는 불과 23세의 나이로 아버지의 지역구였던 쿠알라리피스 국회의원에 뽑혀 정계에 입문한다. 25세 때 통신·에너지·우정부 차관으로 발탁돼 말레이 역사상 최연소 각료가 됐다.

라작은 부친의 후광과 가문의 재력을 바탕으로 고속출세의 길을 걷는다. 내각(국방장관, 교육장관)과 현 말레이 여당인 통일말레이국민기구(UMNO)의 요직을 두루 독차지했다. 2004년엔 말레이시아의 국부(國父)로 평가받는 4대 총리 마하티르 모하맛의 지원을 얻어 부총리에 발탁된다. 마하티르는 1년 전 정계를 은퇴했지만 여전히 말레이 정국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5년 후 라작은 아버지에 이어 2대째 총리 직에 오른다.

○부미푸트라

말레이시아는 13개 주와 3개의 연방으로 구성된 연방제 국가다. 다양한 인종과 종교가 혼재돼 있다. 인종 구성은 말레이계(50%), 중국계(22.6%), 오랑 아슬리 등 원주민(11.8%), 인도계(6.7%) 등이며 종교 또한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기독교 등으로 제각각이다.

이런 말레이시아에는 말레이 판 ‘아파르트헤이트’라 불리는 인종차별 정책이 있다. 바로 1957년 독립 후 60년 간 지속된 말레이계 우대 정책 ‘부미푸트라(Bumiputra)’다.

말레이어로 ‘땅의 아들’을 뜻하는 부미푸트라는 말레이 사회 갈등의 근원이다. 독립 당시만 해도 말레이 경제는 전체 인구의 절반도 안 되는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었다. 이에 말레이계의 불만이 많았고 1969년에는 인종 갈등으로 인한 인종폭동이 일어나 약 800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적도 있다. 말레이 정부가 독립 당시 헌법에 공무원 채용, 장학금 부여, 정부허가 사업 진출 등에서 말레이계와 원주민에게 우선권을 주는 부미푸트라를 명기한 이유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부미푸트라는 정권연장 수단으로 변질됐다. 국민의 절반을 차지하는 말레이계만 만족시켜주면 어쨌든 선거에서는 승리할 수 있으므로 권력자들이 중국계와 인도계의 불만을 무시하고 노골적 친(親) 말레이 정책을 쓰기 시작했다.

라작 총리의 부친인 압둘 라작 전 총리, 마하티르 모하맛 전 총리 등은 자신의 지지기반 확대를 위해 부미푸트라를 노골적으로 조장했다. “부미푸트라가 말레이 국가 경쟁력을 해치고 사회 단합의 장애물로 작용한다”는 반대파들의 논리는 권력자 앞에서 무용지물이었다.

라작 총리도 마찬가지다. 집권 전 부미푸트라를 완화할 뜻을 밝혔지만 집권 후 180도 달라졌다. 특히 그는 2013년 총선 당시 주택보유와 사업자금 융자 등에서 말레이계 우대를 더 강화한 신(新) 부미푸트라 정책을 내놨다. 이를 통해 선거에서는 계속 승리했지만 내부 갈등은 갈수록 곪아가고 있었다.



○부패 스캔들

2015년 7월 2일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우디아라비아 왕가가 테러 방지 지원을 빌미로 라작 총리의 개인계좌로 27억 링깃(약 8000억 원)의 돈을 입금했다고 보도했다. 라작 총리가 2009년 설립한 국영회사 말레이시아개발유한공사(1MDB)의 자금 횡령 및 돈세탁 의혹도 발견됐다. 그가 국방장관 재직 시절 영국, 프랑스 등 선진국 방산업체와 계약을 맺으면서 뒷돈을 받은 의혹도 드러났다.

그의 부인 로스마 여사가 미국 뉴욕, 영국 런던 등을 오가며 수십억 원 어치의 보석류와 명품을 사들인 것, 라작 총리 부부가 쿠알라룸푸르 소재 노화방지 클리닉에서 1회 3억 원 상당의 노화방지 시술을 받은 것, 총리 일가족이 정부 전용기를 이용해 해외여행을 다녀온 사실까지 밝혀졌다. 로스마 여사는 과거 다이아몬드와 에르메스 버킨백을 수집하는 취미 때문에 대중의 비난을 받은 전력도 있다.

그럼에도 라작 총리는 “사우디 왕가의 ‘기부’였다”고 태연자약했다. 자신의 퇴진을 노리는 정적들이 스캔들을 조장했다는 음모론까지 폈다. 국민 분노가 들끓자 검찰이 마지못해 수사에 나섰다. 하지만 검찰총장이 총리의 측근인 상황에서 제대로 된 수사가 이뤄질리 만무했다. 결국 말레이 검찰은 2016년 1월 이 사건을 무혐의로 종결했다.


▲ 라작 총리의 비리 의혹을 전하는 외신 보도

사건이 무혐의로 종결되자 22년간 말레이시아를 통치했던 마하티르 모하맛 전 총리가 나섰다. 마하티르 역시 독재와 인권 탄압으로 비판받긴 했지만 부패 문제에서는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다. 그는 2016년 초부터 대대적 라작 퇴진 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당시 91세의 나이로 말레이시아원주민연합당이라는 신생 정당까지 창당했다.

라작 총리는 이를 역공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노욕에 휩싸인 마하티르가 자신의 정계 복귀를 위해 나에 대한 음모론을 조장하고 있다”며 지지자들을 결집시켰다. 자신의 퇴진을 주장해 온 집권당 통일말레이국민기구(UMNO)의 주요 당직자도 모두 쫓아냈다. 자신을 반대하는 주요 시민 활동가와 야권 인사들도 무더기로 체포하며 독재 기반을 구축했다.



○김정남 사건 마무리 통해 장기집권 발판 구축?

김정남 사건을 수사하는 말레이시아 경찰은 신속하고 깔끔한 일처리로 호평을 받고 있다. 사건이 터지자마자 주요 용의자들을 모두 잡아들였다. VX라는 신종 화학무기가 사용된 피살 배후까지 명쾌하게 밝혀냈다. 말레이시아를 동남아시아의 흔한 저개발국으로 생각했던 일부 한국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국제 사회에 사건의 진행 상황을 알리고 안하무인인 북한 정권을 상대하는 정부의 태도도 수준급이다. 라작 총리는 강철 말레이 주재 북한 대사가 “말레이 정부의 조사 결과를 믿을 수 없다”고 하자 “외교적으로 무례하다. 사건을 철저히 객관적으로 조사하고 있다”고 받아친 뒤 얼마 후 그를 추방했다. 부총리, 문화장관, 주택장관, 국방장관 등 내각의 주요 인사들도 줄줄이 대북 강성 발언을 이어가고 있다.

국제 사회의 호평도 잇따른다. 대니얼 러셀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차관보는 7일 워싱턴에서 “김정남 사건을 다루는 말레이시아 정부의 빠르고 전문가적이며 세련된 매너에 존경을 표한다”고 극찬했다. 이것이 장기적으로는 라작 총리의 지지율 상승으로 이어질 것이라는 전망도 많다.

집권 후 내내 ‘부패한 권력자’의 인상을 남겼던 라작 총리. 그는 과연 이번 사건을 계기로 이미지 변신에 성공할 수 있을까. 전 세계가 그를 주목하고 있다.

하정민 기자 dew@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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