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사 지시는 일단 녹음하자” 몸사리는 공무원들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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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순실 사태 지켜보며 몸조심 기류
“나를 보호할 안전장치 필요”… 추후 직권남용 혐의 피하려 메모도

행정자치부 서기관 A 씨는 얼마 전 스마트폰에 특별한 애플리케이션(앱)을 내려받았다. 통화내용을 자동으로 녹음하는 앱이다. 주변 동료들의 조언 때문이었다. 상사의 업무 지시를 그대로 따랐다가 감사를 받는 등 애꿎게 피해를 당한 동료들이다. 무엇보다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를 지켜보며 통화 녹음의 중요성을 알게 됐다. A 씨는 “가족, 친구들과의 사적인 통화까지 저장돼 꺼림칙했지만 나를 보호할 ‘안전장치’가 필요했다”며 “혹여 녹음 파일이 손상될 가능성에 대비해 컴퓨터에 사본을 저장해둔다”고 말했다.

미래창조과학부 사무관 B 씨는 월요일 회의 때마다 스마트폰의 녹음 앱을 실행한다. 회의 내용이 잘 녹음되도록 스마트폰을 일부러 책상 위에 둔다. 상사가 ‘애매한’ 지시를 했을 때 이를 녹음해 혹시 모를 뒤탈을 막기 위해서다. B 씨는 “무슨 말이든 이전보다 훨씬 열심히 기록하고 녹음까지 하자 상사들이 ‘부당한 지시 아니니까 그럴 필요 없다’며 우스갯소리를 던지기도 한다”며 “녹음하는 것에 불편한 기색을 보이는 상사도 있어 회의 분위기가 썰렁할 때도 있다”고 말했다.

“녹음이든 메모든 ‘방패막이’ 하나씩은 준비해야 한다.” 요즘 공무원들 사이에서 도는 말이다. 청탁금지법과 최순실 사태를 거치며 권한 밖의 일을 했을 때 처벌 가능성은 크게 높아졌다. 만약 문제가 발생했는데 서로 책임을 미룰 경우 녹음파일이 결정적 증거가 될 수 있다.

상사의 지시도 속된 말로 잘 먹히지 않는다고 한다. 블랙리스트 논란을 겪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한 직원은 “일단 위에서 내려오는 건 다 쳐버리자는 분위기”라며 “직무범위 안에 있는 일로 생각했던 업무도 직권남용죄로 처벌될 수 있으니 구속되는 것보다 승진을 포기하는 게 낫다는 생각까지 든다”고 말했다. 문체부뿐 아니라 공직사회 전반에 “새로운 일이 내려오는 것 자체가 두렵다. 무슨 일을 하든지 현상 유지를 하는 게 제일 안전하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

물론 이런 현상은 행정의 투명성을 높이는 긍정적 효과도 있다. 그러나 공무원들이 지나치게 몸을 사리면 오히려 공직사회의 혁신이 퇴보할 것이라는 지적도 나온다. 문명재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는 “상사의 지시와 행위를 꼼꼼히 기록하는 건 공직사회 투명성을 높이는 데 도움이 되지만 지나친 견제는 정부 전체의 움직임에 독이 될 수도 있다”며 “공무원들이 정치적 이해관계에 이용됐던 과거가 만든 씁쓸한 풍경”이라고 분석했다.

이호재 hoho@donga.com·김동혁·황하람 기자

#공무원#녹음#최순실사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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