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정훈의 호모부커스]사라진 책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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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 출판평론가
표정훈 출판평론가
묘청과 함께 서경(평양) 천도를 꾀하다 김부식에게 죽임을 당한 정지상은 고려를 대표하는 시인이지만, 그의 문집 ‘정사간집(鄭司諫集)’은 전해지지 않는다. 신라 진성여왕이 위홍과 대구 화상에게 편찬케 한 향가집 ‘삼대목(三代目)’도 제목만 전해진다. 고구려 역사서 ‘유기(留記)’와 ‘신집(新集)’, 백제 역사서 ‘서기(書記)’도 마찬가지여서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751년 고선지가 이끄는 당군이 아바스 왕조 군대에 패한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로 끌려 간 당군 가운데 두환(杜環)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그는 중앙아시아와 서아시아, 지중해 일대를 전전하다 762년 페르시아 만에서 상선을 타고 귀국했다. 두환이 보고 들은 것을 기록한 ‘경행기(經行記)’는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의 친족 두우(杜佑)가 편찬한 ‘통전(通典)’ 등 여러 문헌에 다음 내용을 비롯한 일부가 남았다.

‘불림국(비잔틴) 사람들의 얼굴은 홍백색이다. 남자들은 흰옷을 즐겨 입고 여자들은 구슬로 치장하며 비단을 입는다. 술 마시기를 좋아하고 마른 빵을 주로 먹는다. 7일마다 하루를 쉬는데 장사도, 돈 출납도 하지 않고 종일 쉰다.’

중국 후한 시대 반고(32∼92)가 편찬한 ‘한서’의 ‘예문지(藝文志)’에는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 많은 문헌이 나온다. 596개 학파의 1만3269권이 언급되는데 ‘논어’만 하더라도 12개 학파의 229권이다. 인간의 감성과 예술에 관한 텍스트로 추정되는 ‘악경(樂經)’도 사라졌다. 다만 ‘예기’ 악기 편과 ‘순자’ 악론 편을 통해 대강을 짐작할 수 있다.

서양에서는 기원전 5세기 이전 그리스 철학자들의 논저 대부분이 전해지지 않는다. 다른 문헌에 나온 내용을 모은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자들의 단편선집’으로 만나야 한다. 전란, 화재, 천재지변, 고의적인 파괴, 무지와 무관심 등과 함께 나무, 양피지, 종이 같은 책 만드는 재료의 물리적 소실(消失)도 책이 사라지는 원인이다.

근현대 문헌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는 없다. 19세기 초부터 1980년 이전까지 나온 책 대부분은 산성지(酸性紙)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지천년견오백(紙千年絹五百)’, 종이는 1000년을 가고 비단은 500년을 간다 했지만, 전통 한지와 달리 변색되고 바스라지기 쉬운 산성지의 수명은 50∼100년이다. 탈산 처리가 시급하다. 2016년 말 국립중앙도서관에서 문을 연 대량 탈산처리실의 역할이 크게 기대된다.
 
표정훈 출판평론가
#서경 천도#김부식#정지상#지천년견오백#탈산처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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