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민애의 시가 깃든 삶]첫눈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9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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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눈 ―박성우(1971∼ )

첫눈은 강물에게로 가서 강물이 되었다
첫눈은 팽나무에게로 가서 팽나무가 되었다

강물도 팽나무도 되지 않은 첫눈을
맨손으로 받고 맨손으로 모아,
꽁꽁 뭉친 첫눈을 냉장고에 넣었다

긴긴 밤 시를 쓰다가도
긴긴 밤 외롭단 말을 하려다가도
냉장고 얼음 칸을 당기면
첫눈 내리던 희푸른 밤이 찾아왔다

자울자울 졸던 강 건너 먼 불빛은
첫눈 내리는 강물을 찰바당찰바당 건너오고
눈발은 팔랑팔랑 팽나무 가지를 흔들어 깨운다

 
  ‘첫사랑’은 일생에 단 한 번만 온다. 처음인 데다 다시는 없을 일이니 아련하고 소중하다. 첫사랑만 그럴까. 첫 만남, 첫아기, 첫 직장. 이렇게 처음과 함께하는 많은 단어들은 떨리는 설렘을 전해준다.

 첫눈이 내렸다. 많은 ‘첫’ 번째 일들은 일생에 단 한 번만 존재하는데, 첫눈이라는 말은 매년 쓸 수 있다. 첫사랑은 매년 돌아오지 않지만, 대신 첫눈은 매년 다시 내린다. 물론 올해의 첫눈은 작년의 첫눈과 다르다. 그래도 첫눈이라는 말을 매년 되풀이할 때마다, 처음으로 돌아간 듯한 마음을 얻게 된다. 그것은 깨끗하고, 선하며, 반갑고, 신비하다. 덕분에 우리는 매년 첫눈 오는 날에 깨끗하고, 선하고, 반갑고 신비한 마음을 가질 수 있다.

 박성우 시인의 ‘첫눈’은 이 느낌을 고요하게 간직하고 있다. 특히나 첫 구절이 가슴에 꽂힌다. 첫눈이, 요정이나 사람처럼 강물에게 가서 조용히 두드린다. 그리고 가만히 녹아들었다. 첫눈이, 말없는 팽나무를 찾아가 손을 얹었다. 그리고 가만히 팽나무에 스며들었다. 눈송이가 사라지는 순간이 이렇게나 섬세하다.

 시인은 눈 뭉치를 만들었다고 했지만, 그것은 사실 강물과 팽나무와 눈이 내리던 밤을 기억한다는 말이다. 이 모두가 시인의 마음에 존재하는 것, 그의 마음 안에서 눈이 내렸고 강물이 흘렀고 팽나무가 자랐다. 그러니 눈을 넣어 둔 곳은 냉장고가 아니라 시인의 마음속일 것이다.

 올해 우리의 첫눈은 끝났다. 그런데 이 시를 읽으면 언제든 첫눈을 만날 수 있다. 그것은 아직도 ‘찰바당찰바당’거리는 강물에 있고, ‘팔랑팔랑’대는 팽나무 가지 사이에 있다. 조금 억지를 부려보자. 첫눈이 닿은 모든 것이 깨끗하고 선하며 반갑고 신비하다.
 
나민애 문학평론가
#첫눈#박성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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