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동정민]베르사유 궁전 속 대통령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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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정민 파리 특파원
동정민 파리 특파원
 박근혜 대통령은 프랑스를 좋아했다. 지난해 기자가 미국행 대통령 전용기 안에서 “매년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만나 정이 많이 들었을 것 같다”고 하자, 박 대통령은 대뜸 프랑스 대통령 이야기를 꺼내며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과도 매년 만나 정이 많이 들었다”고 대답했다. 박 대통령은 취임 후 프랑스를 3번이나 방문했다. 그는 22세 때 6개월 동안의 짧은 프랑스 연수 시절을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기로 꼽는다.

 “여긴 왕의 목을 쳤던 나라다.”

 지난달 26일 박근혜 퇴진 집회가 열린 에펠탑 앞 트로카데로 광장에서 만난 김현경 씨(29)는 유럽 여행 중 일부러 파리를 찾았다며 이렇게 말했다. 혁명의 역사를 가진 프랑스에서 ‘모든 이는 평등하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한다’는 진리를 외치고 싶었다면서 한 말이다.

 1789년 7월 14일. 혁명에 불이 붙은 그 시각, 루이 16세는 한가로이 사냥을 나갔다. 그날 밤 그는 일기장에 “오늘은 아무것도 잡지 못했다”고 썼다. 왕은 그토록 민심을 몰랐다.

 루이 16세가 단두대에 선 건 그로부터 4년 후였다.

 시민들의 첫 요구는 왕의 파리 복귀였다. 20km 떨어진 베르사유 궁전에 살다 보니 국민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버티는 왕을 억지로 파리로 끌고 왔더니 이번엔 왕이 가족만 데리고 한밤중에 하녀로 변장해 도주하다 붙잡혔다.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친정인 오스트리아의 힘을 빌려 권력을 다시 잡으려 한다는 의심이 퍼지자 국민들의 분노는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배고픔보다 참을 수 없었던 건 국민을 무시하는 왕의 태도였다. 사형을 선고 받은 왕의 죄목은 국가반역죄였다.

 불행하게도 박 대통령에게 루이 16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최순실의 국정 농단보다 더 국민을 좌절하게 하는 건 박 대통령의 침묵이다. 돌이켜보면 임기 내내 박 대통령은 국민과 20km 정도 떨어져 있었다. 장관 대면 보고가 없다, 언론과 질의응답이 없다는 불통 논란은 결국 그 좁히지 못한 거리가 문제였다. 중간에서 거리를 좁혀줄 제대로 된 참모도 없었다.

 1789년 7월 14일 늦은 밤, 루이 16세에게 한 신하가 헐레벌떡 뛰어와 바스티유 감옥 함락 소식을 전했다. “폭동인가”라는 왕의 물음에 신하는 “아닙니다. 폐하, 혁명입니다”라고 말했다.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은 구속 전 “대체 이 지경이 되도록 뭐 했나”라는 주변의 질문에 “대통령 사적 영역이어서 개입할 수 없었다”고 털어놨다. 국민보다 대통령의 사적 영역이 더 중요하다는 말이었다.

 그 정호성과 2013년 임기 첫해 겨울, 따로 만나 물은 적이 있다.

 “성공한 대통령을 만들 수 있겠는가.”

 박근혜 대통령을 만들겠다는 신념으로 15년을 바친 그의 목소리는 의외로 작았다.

 “대통령이 DJ 정부 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나라 망치려는 대통령이 있겠나. 대통령 되면 다 애국자 된다. 그래도 안 되는 건 그만큼 어려운 자리라는 것이다.’ 나는 성공은 바라지도 않는다. 국민들에게 욕만 안 먹으면 좋겠다.”

 비선 실세 최순실에게 연설문을 검사받고 있을 때니 성공은 어렵겠다는 직감은 있었을 테다. 욕 안 먹는 대통령도 어찌 보면 과욕이었다. 역대 대통령들은 아무리 어려워도 그 답을 ‘강남 복부인 친구’에게서 찾진 않았다.

 단두대에 선 루이 16세는 “프랑스는 흘리지 말아야 할 피를 흘리고 있다”며 끝까지 결백을 주장했지만 북소리에 묻혀 누구도 제대로 듣지 못했다. 박 대통령의 진솔한 고백과 반성, 행동도 너무 늦으면 ‘국민의 함성’ 속에 말할 기회조차 사라질지도 모른다.
 
동정민 파리 특파원 ditto@donga.com
#최순실#박근혜#정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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