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석 기자의 스포츠 한 장면]프로축구에서 유리천장 뚫은 20대 女감독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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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2016시즌 홍콩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스턴 스포츠클럽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 찬웬팅 감독(오른쪽). 사진 출처 이스턴 스포츠클럽 홈페이지
2015∼2016시즌 홍콩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스턴 스포츠클럽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는 찬웬팅 감독(오른쪽). 사진 출처 이스턴 스포츠클럽 홈페이지
이종석 기자
이종석 기자
 남자 감독 A가 있었다. A는 여자 프로스포츠 팀 감독을 맡고 있을 때 이런 얘기를 했다. “여자한테 지면 쪽팔리잖아. 한 며칠 밥맛도 없을걸.” 여자 팀 감독이라면 이기나 지나 상대는 늘 여자 팀이다. 만날 이기는, 승률 100%의 팀이 아닌 다음에야 질 때도 있게 마련인데 그럴 때마다 쪽이 팔린대서야 어디 제명대로 살 수 있겠나. A의 말도 그런 뜻은 아니었다. 여자한테 지면 쪽팔린다는 건 상대 팀 선수들이 아니라 감독을 두고 한 말이다. 당시 리그에 여성 사령탑이 처음 배출됐을 때인데 여자가 감독으로 있는 팀에 지면 쪽도 팔리고, 기분도 나쁘고, 하여간 그럴 것 같더라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A는 여자 감독 팀과 경기를 할 때면 자기 팀 선수들에 대한 닦달이 다른 때보다 더 심했다고 한다.

 다 같은 경기인데 감독이 여자인 팀에는 지면 안 된다? 무슨 ‘숙명의 라이벌’ 한일전도 아니고 뭐 이런 개떡 같은 소리가 다 있나 싶었다. 남자 사장이 경쟁 업체의 여자 사장보다 돈을 못 벌면 쪽팔린다는 얘기 아닌가. 다른 팀 남자 감독들도 A와 비슷한 생각을 갖고 여자 감독 팀을 상대했는지 어쨌는지는 몰라도 하여간 당시 리그 최초이자 유일한 여자 감독이던 B는 성적 부진으로 부임 후 1년을 못 버티고 물러났다.

 사흘 전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2016년 아시아축구연맹(AFC) 시상식이 있었다. 올 시즌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 팀인 전북현대 최강희 감독이 ‘올해의 남자 감독상’을 받았다. 그리고 ‘올해의 여자 감독상’은 홍콩의 찬웬팅에게 돌아갔다. 축구 감독은 유리천장이 아주 높고 단단한 직업이다. 특히 남자 팀일 경우에는 더 그렇다. 여자 팀 감독을 여성이 맡는 경우는 조금씩 늘고 있지만 축구에서 남자 팀을 지도하는 여성 감독은 아주 드물다. 국내에서도 여자 실업축구에는 여성 감독이 있지만 남자 프로축구에는 1, 2부 리그 23개 팀을 통틀어도 여자 감독은 없다. 

 올해 28세인 찬웬팅은 그렇게 높은 유리천장을 뚫은 남자 축구 팀 감독이다. 찬웬팅은 지난해 홍콩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1부 리그) 이스턴 스포츠클럽의 감독이 됐다. 그리고 부임 첫 시즌인 2015∼2016시즌에 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프로 1부 리그 남자 축구 팀을 이끌고 리그 정상에 오른 세계 최초의 여성 감독이다. 이 일로 찬웬팅은 기네스북에 올랐다. 지난달 영국 공영방송 BBC가 발표한 올해의 여성 100인에도 포함됐다.

 지난 시즌 홍콩 프리미어리그에는 찬웬팅이 지휘하는 이스턴을 포함해 모두 9개 팀이 리그에 참가했다. A 같은 사고방식이면 나머지 8개 팀 남자 감독들은 죄다 쥐구멍이라도 찾아 기어들어 갔어야 한다. 그냥 한 번 진 것도 아니고, 그것도 20대의 리그 최연소 여자 감독에게 우승을 내줬으니 쪽팔리기로 치자면 이보다 더한 경우가 있겠나….

 승부의 세계에서는 상대가 누구든 이기면 좋고 지는 건 싫다. 그런데도 여자 감독 팀한테 지면 더 쪽팔린다고 생각하는 건 기본적으로 남자가 여자보다 뭐든 더 잘한다는(잘해야 한다는) 고타분한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다. “남자 성인 선수들의 경기 후 회복 능력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선수 생활은 했지만 프로에서는 뛰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우리 팀 선수들과 의사소통이 잘 안될 때가 있었다.” 찬웬팅은 남자 프로팀을 지도하면서 겪은 애로를 솔직하게 털어놨다. 그럴 때마다 찬웬팅은 남자 코치들의 도움을 받았고, 선수들의 의견도 많이 들었다고 한다.

 남자고 여자고 간에 선수 시절 이름을 날렸다고 지도자로 반드시 성공하는 건 아니다. 선수 때의 감(感)만 믿고 공부를 안 하는 스타 출신 지도자들이 망가지는 경우를 적지 않게 봤다. 찬웬팅은 대학에서 축구에 관한 논문을 썼다. 대학 졸업 후 전력분석관을 지낸 찬웬팅은 유소년 팀을 지도하면서 우승도 경험했고 홍콩 여자대표팀 코치도 지냈다. AFC 지도자 최고 등급인 A급 지도자 자격증도 땄다. 국내 프로축구의 40대 감독 중에도 A급 자격증이 없는 지도자가 꽤 있다. 찬웬팅은 이론에 지도 경험을 찬찬히 더했다. 그래도 모르는 건 물어물어 공부하면서 채웠다. 이런 감독한테, 여자라는 이유만으로 “지면 쪽팔린다”고 해버리면 그 사람은 나쁜 사람이다. 찬웬팅은 자신이 이룬 성취에 대해 얘기하면서 “어린 시절 잉글랜드의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을 좋아하게 된 뒤로 축구에 빠져 살았다. 그냥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모든 걸 쏟아부었을 뿐이다”라고 했다. 남자 감독들을 이겨서 기쁘다거나 자랑스럽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멋있다.

이종석 기자 wing@donga.com
#이스턴 스포츠클럽#찬웬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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