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의 향기]日 야욕이 집어삼킨 독도의 주인 ‘강치’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12월 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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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도강치 멸종사/주강현 지음/296쪽·1만5000원·서해문집

일본 오키 제도에서 온 어민이 1934년 독도에서 자망(刺網)에 걸린 강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일본 어렵회사의 남획으로 독도 강치는 멸종됐다. 서해문집 제공
일본 오키 제도에서 온 어민이 1934년 독도에서 자망(刺網)에 걸린 강치를 끌어올리고 있다. 일본 어렵회사의 남획으로 독도 강치는 멸종됐다. 서해문집 제공
 잘 아는 생명의 죽음이 괴롭다면 잘 모르는 생물 종의 소멸에 느껴야 할 감정은 응당 부끄러움일 게다.

 “섬 북쪽에 세 바위가 벌여 섰고, 그 다음은 작은 섬, 다음은 암석이 벌여 섰으며… 또 바다의 섬 사이에는 인형 같은 것이 별도로 선 것이 30여 개나 되므로 의심이 나고 두려워서….”(성종실록)

 1476년 영흥(永興) 사람인 김자주가 독도 부근까지 다녀온 뒤 임금에게 보고한 내용이다. 여기서 ‘인형 같은 것’은 바로 독도 강치(학명 ‘일본 강치’)로 보인다. 1906년 독도를 방문한 일본인도 “항상 바위 위에서 숙면을 취한다.… 많을 때는 만 마리나 된다”는 강치 목격담을 남겼다. 수십만 년 이상 강치 떼는 독도를 빼곡히 채우고 평화롭게 잠을 자거나 새끼에게 젖을 줬을 것이다.

 독도 강치는 19세기 중엽에 4만∼5만 마리, 1900년대 초반까지도 2만∼3만 마리는 있었다고 추정된다. 한때는 독도뿐 아니라 동해안 전체가 서식처였다. 옛날에 울릉도를 가지도(可支島)라고 부른 것도 강치의 옛 이름인 ‘가지어’ 혹은 ‘가제’에서 연유했다고 한다.

 그러나 일본인 어부들은 19세기 말부터 일제강점기까지 강치 수만 마리를 잡아 씨를 말렸다. 일본의 어렵회사들은 1904∼1913년에만 강치 1만4000마리를 잡아 기름을 짜고 가죽을 벗겼다.

 해양문명사학자인 저자(제주대 석좌교수)는 “대체로 한국 어민은 전통적으로 물개류나 바다사자 잡이를 하지 않았고 자연과 공생했다. 가죽을 팔기 위해 바다 포유류를 잡아 죽이는 일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없었다”고 말한다.

 독도 강치는 결국 광복 뒤에는 개체 번식이 불가능할 정도의 소수만 남았고, 1975년 두 마리가 목격된 게 마지막이다. “마지막 강치는 가재바위 위나 후미진 바위 그늘에서 끼륵거리며 최후를 맞이했을지 모른다.”고 저자는 상상한다.

 일본인 어부들의 강치잡이는 일제의 독도 영토 ‘편입’을 촉발하기도 했다. 1904년 강치잡이꾼 나카이 요자부로가 독도의 강치잡이를 독점하려고 ‘독도 영토 편입 및 차용 청원’을 일본 내무성에 제출한다.

 일본 정부는 이 청원서를 계기로 논의를 서둘러 한국 정부는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1905년 2월 독도의 영토 편입을 일방적으로 결정했다.

 환(環) 동해 곳곳을 찾아다닌 저자의 발품이 책에 담겼다. 저자는 독도 강치잡이의 본향인 오키 제도의 고카이 촌을 방문해 옛날 강치를 사냥했던 녹슨 총을 목격하기도 하고, 사료관에서 여전히 일본 정부가 이 마을 사람에게 독도 광물의 채굴권을 법적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도 알아낸다.

 독도는 누구 땅일까? 생태적으로는 강치의 땅이었다. 저자는 “일본은 자신들의 강치잡이 역사를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는 증거라고 들이대지만 강치 학살은 반문명적 범죄 행위였다”며 “영유권 타령에만 머물지 말고 국민국가를 뛰어넘는 문명사적 차원에서 해양 문제에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익숙지 않은 일본의 옛 지명들이 책에 꽤 나오지만 흐름을 따라가는 데는 무리가 없다.

조종엽기자 jjj@donga.com
#독도강치 멸종사#주강현#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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