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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경복궁(청와대) 설계자’ 정도전의 속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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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영배 전문기자의 풍수와 삶]‘경복궁(청와대) 설계자’ 정도전의 속뜻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입력 2016-11-23 03:00수정 2016-11-23 0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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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도성도(필사본·서울대 규장각 소장).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필자가 근무하는 사무실에서는 북악산 아래 청와대와 경복궁이 한눈에 들어온다. 서울은 어디에 내놔도 꿀리지 않는 대명당이다. 그런데 북악산 자락만큼은 자릿값을 못 하는 것 같다. 주말마다 촛불시위가 열리는 세종대로와 청와대 주변을 바라보노라면 ‘경복궁 설계자’ 삼봉 정도전(1342∼1398)이 떠오른다. 청와대는 경복궁의 ‘부속 작품’이니 정도전도 요즘 마음이 편치 않을 듯하다.

 600여 년 전, 조선 개국 때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개국공신 정도전은 조선의 새 도읍지로 한양(지금의 서울보다는 좁은 한양도성)이 결정되자 북쪽의 북악산 아래를 궁궐터로 지목했다. 이유는 하나. ‘제왕(궁궐)은 북쪽에 앉아 남쪽을 바라봐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 논리는 유학자 정도전이 규범으로 삼은 ‘주례·고공기’ 등의 도성건축법과도 맞아떨어진다. 정도전은 북악산을 주산(主山·건축물의 배경이 되는 산)으로 삼아 전조후시(前朝後市·앞은 조정, 뒤는 시장)와 좌묘우사(左廟右社·왼쪽은 종묘, 오른쪽은 사직단)라는 유교적 이상도시를 만들려 했다.

 먼저 경복궁 근정전을 중심으로 남쪽(앞쪽)인 주작대로(세종대로)를 따라 육조(六曹)거리 등 중요 행정기관을 배치했다. 그런데 평지 위에 만든 중국의 도성 체제를 따르려다 보니 문제가 생겼다. 궁궐 뒤가 북악산이어서 시장을 만들 수 없었다. 대안으로 종로와 청계천 일대에 시전과 육의전 등을 만들었다. 궁궐 좌우의 산들도 조화가 무너져 좌묘우사 원칙이 민망해졌다. 종묘가 있는 동쪽(왼쪽)의 낙산 줄기(청룡)는 초라하고 짧은 반면, 사직단이 있는 서쪽(오른쪽)의 인왕산 줄기(백호)는 웅장하면서도 길었다. 

 당시에 다른 주산론이 없었던 게 아니다. 하륜은 무악(毋岳)을 주산으로 삼자고 했다. 그는 도참설과 물길을 중시하는 중국 풍수설을 근거로 한강과 가까운 무악산 아래(지금의 신촌 일대)가 길지라고 주장했다. 태조도 직접 무악을 둘러볼 정도로 관심을 가졌다. 그러나 정도전이 “어찌 술수(術數)하는 자의 말을 믿느냐”고 반대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무학대사는 인왕산을 주장했다. 서쪽 인왕산 자락에서 동쪽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궁궐을 짓자는 것. 정도전은 이 역시 “임금이 동향(東向)하였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며 거부했다. 이에 무학은 “200년이 지나면 내 말을 생각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무학과 정도전의 다툼을 기록한 ‘오산설림초고(五山說林草藁)’의 저자 차천로(1556∼1615)는 무학의 예언처럼 200년 뒤 임진왜란으로 궁궐이 불탄 일 등을 거론하며 정도전을 비난했다. “정도전은 무학의 말이 옮음을 알지 못한 게 아니었다. 그는 다른 마음이 있어서 듣지 않은 것”이라고 공격했다. 왕권(王權)을 약화시키고 신권(臣權)을 강화하려는 정도전의 욕심 탓이라는 것이다.

 사실 정도전의 북악 주산론은 의심스러운 점이 적지 않다. 첫째, 정도전이 근거로 삼은 ‘제왕=남향’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중국 서한(西漢) 시대의 수도 장안성의 경우 제왕이 남향하는 시기도 있었고, 동향하는 시기도 있었다. 둘째, 무학의 주장처럼 인왕산을 주산으로 하면 북악산(청룡)과 남산(백호)이 좌우 균형을 이뤄 한양의 지기(地氣)를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는데 그러지 않았다. 셋째, 그는 도참설과 풍수를 잘 알고 있었으면서도 애써 부인하거나 외면했다.


 그러다 필자는 1년 전쯤 경북의 한 지역신문에서 어떤 기사를 읽고 무릎을 쳤다. 정도전이 궁궐터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는 것이다. “하륜과 자초(무학대사)가 꼽은 곳이 길지(吉地)라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무악 아래는 후학들을 위해 숨겨두어야 했고, 종로는 백성들의 생계를 위해 써야 했다. 그러자니 임금은 백악산 아래밖에 없었다. 용상의 자리는 백성을 생각하느라 잠을 못 자고, 백성을 바라보느라 자손과 형제도 버려야 한다. 그러니 비수가 날아다니는 터에 들어간들 어떻겠는가.”

 정도전을 위한 변명처럼 들리는 말이다. 조선 말기 고종이, 이방원의 미움을 받아 죽은 정도전을 신원(伸寃)시켜 준 이후 경상도와 강원도의 촌로들 사이에 전해진 얘기라고 한다. 사실이라면 정도전은 선지자였다. 오늘날 무악산 아래는 연세대 이화여대 홍익대 서강대 등 명문 사학이 자리 잡고 있고, 종로와 중구 일대는 지금도 왕성한 상업지가 아닌가.

 이 구전을 채록한 작가는 ‘진정한 지도자는 경복궁(청와대 포함)의 비수 정도는 이겨내야 한다’는 게 정도전의 감춰진 뜻이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경복궁은 지도자가 권력을 남용하고 탐욕을 부리는 순간 비수로 작용한다. 반면 국민을 받드는 이에게는 세계적인 지도자가 되도록 도와주는 축복의 터이기도 하다. 권력자들이 청와대 터를 두려워해야 할 이유다.
 
안영배 전문기자·풍수학 박사 ojong@donga.com
#정도전#경복궁#설계자#한양 도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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