텅빈 드라이독 사상초유… 사천서만 8150명 일자리 잃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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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경제 3중고/산업 현장]일감 바닥난 SPP조선 르포

용접 작업장엔 녹슨 자재뿐 SPP조선은 2010년 채권단 공동관리(자율협약) 이후 희망퇴직과 자산 매각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지난해 577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하지만 27개월째 선박 수주를 못 해 일감이 
바닥났다. 주채권은행인 우리은행은 다음 달 재매각을 추진한다. 선박용 철판을 절단하고 용접하던 사천조선소 작업장에는 녹슨 자재들이
 쌓여 있다. 사천=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용접 작업장엔 녹슨 자재뿐 SPP조선은 2010년 채권단 공동관리(자율협약) 이후 희망퇴직과 자산 매각 등 강도 높은 구조조정에 들어가면서 지난해 577억 원의 영업이익을 냈다. 하지만 27개월째 선박 수주를 못 해 일감이 바닥났다. 주채권은행인 우리은행은 다음 달 재매각을 추진한다. 선박용 철판을 절단하고 용접하던 사천조선소 작업장에는 녹슨 자재들이 쌓여 있다. 사천=서영수 기자 kuki@donga.com
경남 사천시 사남면 SPP조선. 이 지역에 폭염경보가 내려진 22일 기온이 35도를 넘어서는 뙤약볕 아래 조선소 작업장에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땀이 줄줄 흘렀다. 5만 t급 원유운반선(탱커) 갑판실에서 파이프 작업을 하던 협력업체 현장소장 장덕조 씨(56)의 얼굴은 벌겋게 익어 있었다.

“철판이 햇볕에 뜨겁게 달궈져서 피부에 살짝 닿기만 해도 화상을 입어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더워서 10분 일하고 선박 밖에서 10분 쉬고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장 씨가 조선소의 재하청 일용직인 ‘물량팀’의 막내로 시작해 현장소장 자리까지 올라가기까지 걸린 기간은 15년. 하지만 이제 배에서 일할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다. 장 씨가 작업하는 선박 건조가 마무리되면 더이상 일감이 없기 때문이다.

장 씨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며 고개를 떨궜다. 옆에 있던 임병준 SPP조선 조달팀 협력사운영파트장은 “주변에서 걱정할까 봐 이번 추석 때 아예 부모님 댁에 내려가지 않는다”고 했다.

○ 수주절벽으로 독 비는 첫 사례

중형 조선소인 SPP조선은 2014년 5월 이후 27개월째 한 건도 수주를 하지 못했다. 2010∼2013년 수주 잔량 기준으로 전 세계 조선소 ‘톱10’에 들었던 SPP조선은 현재 89위까지 추락했다. 글로벌 경기 불황으로 물동량이 줄면서 선박 발주가 급감한 데다 SPP조선은 선수금을 투자한 조선기자재 제조 신사업의 실패로 신용도가 떨어지면서 수주가 부진해졌다.

부지 넓이가 28만 m²인 조선소에 들어서니 선박용 철판을 용접하고 절단하는 대형 작업장에는 녹슨 자재들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직원은 “일감이 있을 땐 이 작업장에만 650여 명이 일했는데 지금은 모두 회사를 그만두고 뿔뿔이 흩어졌다”고 말했다.

SPP 사천조선소에는 현재 5만 t급 원유운반선 4척에 대한 막바지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2척은 다음 달 중순, 나머지 2척은 10월에 진수(새로 만든 선박을 물에 띄우는 것)해 경남 통영시에 있는 덕포 의장공장에 보낼 예정이다. 추가로 건조할 선박은 없다. 선박 설계에 보통 1년이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SPP조선이 당장 수주에 성공하더라도 1년간 독(dock·선박을 건조 및 수리하는 공간)이 텅 비게 되는 것이다.

2002년 설립 후 사천조선소 독이 비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다른 중대형 조선소로 범위를 넓혀도 일감이 떨어져 드라이 독(dry dock·땅을 파서 만든 독)이 비는 사례는 한국 조선 역사상 처음이다. 드라이 독은 바닷물을 막고 배를 건조한 다음 갑문을 열어 배를 띄우는 방식이다. 초기 투자 비용이 많이 들지만 플로팅 독(floating dock·바다에 띄운 독)에 비해 훨씬 효율적이어서 조선소의 가장 전통적인 설비다.

배승만 SPP조선 사장은 “조선소는 사람이 없으면 그냥 흉물스러운 고철장일 뿐”이라며 “이건 시작이다. 당장 수주 벼락이 떨어지지 않는 한 다른 조선소들로도 우리와 같은 상황이 급격히 확산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중형 선박 시장에서도 충분히 기술경쟁력이 있는데 국내 회사가 다 무너지면 주도권을 중국과 일본에 빼앗길 수밖에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 일할 곳을 잃은 사람들

일감 공백이 생기면 회사로서는 인력을 줄일 수밖에 없다. 2012년 사천조선소에서는 정규직인 관리직 1400명과 다양한 협력업체에 소속된 생산직 7000여 명이 일했다. 지금은 관리직 300여 명과 생산직 1000여 명만 남았다. SPP조선은 7월 1차 희망퇴직에 이어 올해 말까지 추가 희망퇴직을 받아 관리직을 250명까지 줄일 계획이다. 비정규직인 생산직은 일감이 떨어지는 10월이면 한 명도 남지 않게 된다. 4년 사이 8150명의 일자리가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조선업 전반에 불황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면서 SPP조선을 떠난 직원들은 갈 곳을 찾지 못하고 있다. ‘퇴직 칼바람’에서 살아남은 한 40대 직원은 “30대들은 9급 공무원 시험을 많이 준비한다”며 “얼마 전 퇴직한 한 간부사원은 포도농사 지을 곳을 알아보러 다닌다고 하더라”며 씁쓸해했다.

사천조선소에서 만난 이들 중에는 대책 없는 정부에 날을 세우는 이들도 있었다. 정부가 6월 조선업을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했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전혀 체감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유였다. 한 직원은 “특별고용지원업종으로 지정했다지만 조선업 일자리가 씨가 말랐는데 취업지원센터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반문했다. 다른 직원도 “실업급여를 두 달간 더 준다는데 ‘언 발에 오줌 누기’일 뿐”이라고도 했다.

최근 통영시청은 SPP조선을 포함한 각 조선소에 조선업 근로자들에게 뭐가 필요한지 알려달라는 공문을 보냈다. 차영건 SPP조선 의장담당 상무는 “공문을 받았지만 당장 우리가 무엇을 요청해야 할지도, 요청한다고 시에서 뭘 해줄 수 있는지도 몰라 그저 막막할 뿐”이라고 푸념했다.

회사로서는 ‘재매각’이란 희망의 끈만 부여잡고 있다. 배 사장은 “채권단이 추석 이후 재매각을 다시 추진하겠다고 한 만큼 하루빨리 새 주인을 만났으면 한다”며 “일부 기업이 관심을 두고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고 말했다.

회사를 떠난 이들 중에는 회사가 하루빨리 정상화돼 내년이라도 재입사하길 간절히 바라는 이도 많다고 했다. 그러나 현장에서 만난 한 직원은 “이미 한 차례 매각이 무산되면서 이번에도 ‘희망고문’이 되지 않을까 걱정”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사천=정민지 기자 jmj@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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