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진호 어문기자의 말글 나들이]노랭이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8월 23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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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진호 어문기자
손진호 어문기자
“노랭이라 비웃으며 욕하지 마라/나에게도 아직까지 청춘은 있다.” 기분 좋게 취한 날이면 이 땅의 아버지들이 한 번쯤 목청껏 불러 젖혔을 ‘아빠의 청춘’의 노랫말이다.

노랫말 속 ‘노랭이’는 우리 말법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많은 이가 ‘속이 좁고 마음 씀씀이가 인색한 사람’을 가리켜 ‘노랭이’라 하지만 표준어는 ‘노랑이’다. 사전은 ‘노란 빛깔의 물건’이나 ‘털빛이 노란 개’, ‘속 좁고 인색한 사람’ 등을 모두 노랑이로 뭉뚱그려 놓았다. 노랭이가 있긴 한데, ‘물잠자리의 애벌레’를 일컫는다.

한때 금기어 취급을 받던 ‘빨갱이’도 그랬다. ‘빨간빛을 띤 물건’과 ‘공산주의자’는 모두 ‘빨강이’가 표준어였다. 한데 언중은 공산주의자는 빨강이 대신 ‘빨갱이’를 더 자주 사용해 결국은 표준어로 만들었다.

그렇다면 이와 마찬가지로 ‘노란 빛깔의 물건’은 노랑이로, ‘인색한 사람’은 노랭이로 쓰면 어떤가. 북한은 우리와 달리 노란색의 물건, 노란색의 개나 고양이 같은 짐승, 인색한 사람을 모두 ‘노랭이’라 한다.

노랭이를 푸대접하는 것은 (ㅣ)모음 역행동화’를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우리말법 때문이다. 이모음 역행동화란 뒷소리에 있는 이모음이 앞소리에 영향을 미쳐(역행) 앞소리가 뒷소리와 비슷해지거나 같아지는 현상이다(동화). 아비가 애비로, 어미가 에미로, 가랑이가 가랭이로, 아지랑이가 아지랭이로 소리 나지만 우리말법은 이를 인정하지 않고 아비, 어미, 가랑이, 아지랑이만을 표준어로 삼고 있다.

그런데 가만, 이모음 역행동화도 ‘원칙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이지 예외가 없진 않다. ‘새내기’ ‘풋내기’ ‘신출내기’ 등에 쓰이는 ‘-내기(←나기)’나 ‘꼬챙이(←꼬창이)’ ‘냄비(←남비)’ 등은 이모음 역행동화를 인정받은 사례다. 그러니 노랭이라고 표준어가 안 될 이유가 없다.

‘허수애비’란 말을 아시는지. ‘곡식을 해치는 새 따위를 막기 위해 논밭에 세우는 사람 모양의 물건이나 남이 시키는 대로 행동하는 사람’을 이르는 ‘허수아비’의 잘못 아니냐는 사람이 많을 줄 안다. 물론 그렇다. 그러나 다른 뜻으로 ‘허수애비’를 쓰는 경우가 늘고 있다. 직장 일이 바쁘다는 이유로 가정이나 자녀 교육에 소홀한 아버지를 빗댄 신조어로 말이다. 우리말은 오늘도 의미 변화와 확장을 거듭하며 풍부해지고 있다.

손진호 어문기자 songbak@donga.com
#노랭이#아빠의 청춘#허수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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