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 법적 구제 ‘3大 허점’… 제2의 옥시사태 안심 못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6년 5월 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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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 英본사 수사]외국기업, 한국서 안하무인 이유는
①소비자 집단소송제 제한적… 개별적 소송 참여 쉽지않아 포기
②피해자가 피해 입증 책임… 기업이 자료 안 주면 속수무책
③징벌적 손해배상 인정 안해… 승소해도 배상 찔끔… 기업은 배짱

외국 기업들이 허술한 소비자 피해 구제 제도를 악용해 국내 소비자들을 ‘호갱’(호구 고객이라는 뜻의 은어)으로 취급한다는 비난이 커지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 발생 5년여 동안 책임을 회피하던 옥시레킷벤키저는 뒤늦게 대국민 사과에 나설 예정이지만 검찰 수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자 어쩔 수 없이 한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경유차 배출가스 저감장치 조작 사건을 일으킨 독일 폴크스바겐은 최근 미국에서 현금 보상 계획을 내놓았지만 아직 국내에서는 시정조치(리콜) 계획조차 제대로 밝히지 않았다. 2011년부터 지난해까지 개인정보 2400만여 건을 보험사에 팔아 수백억 원의 이득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는 영국 홈플러스(지난해 국내 사모펀드가 인수) 역시 소비자 배상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다.

기업들이 소비자 피해에 ‘안하무인’으로 대응하는 것은 국내 소비자 구제 제도가 선진국에 비해 매우 허술하기 때문이다. 특히 외국 기업들은 이런 점을 잘 알고 있는 데다 국내 기업과 달리 정부의 입김이나 여론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롭기 때문에 소비자 피해 관련 분쟁이 벌어지면 대형 법무법인을 앞세워 “법대로 하자”며 소송에 나서고 있다.

○ 증권 피해에서만 인정한 소비자 집단소송제

전문가들은 제한적인 소비자 집단소송제를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는다. 소비자 집단소송제는 다수의 소비자가 동일한 피해를 당한 경우 일부가 제기한 소송의 효력을 소송에 참가하지 않은 다른 피해자들도 누릴 수 있도록 한 제도다. 미국은 1966년 소비자가 개별적으로 소송을 진행해야 하는 부담을 줄여주기 위한 취지로 이 제도를 도입했다. 일본, 프랑스도 최근 유사한 제도를 도입해 운영 중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에서만 소비자 집단소송을 인정하고 있다. 다른 피해를 겪은 소비자는 반드시 소송에 원고로 참여해야만 배상을 받을 수 있다. 이렇다 보니 피해를 입고도 소송을 포기하는 피해자가 대부분이다.

소송에 가도 피해 입증이 쉽지 않아 기업을 상대로 개인이 승소하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 민사 소송에서는 피해자가 자신이 입은 피해를 입증해야 한다. 전문지식이 없는 소비자가 자신의 피해와 기업의 잘못을 입증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 기업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지 못하면 손해배상을 하도록 규정한 제조물 책임법이 있지만 그 적용 대상이 제조물 결함에만 한정돼 있어 실효성이 낮다는 지적이 많다.

선진국에서는 소비자의 피해 입증을 지원하는 제도적 장치가 잘 마련돼 있다. 피해자가 요구하면 기업은 원칙적으로 관련 문서를 모두 제출하도록 하는 미국의 ‘문서제출명령제도’가 대표적이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원칙적으로 기업이 문서를 제출하지 않는다. 그 대신 피해자의 요청을 법원이 인정한 경우에만 기업으로부터 피해 입증에 필요한 문서를 받을 수 있다. 홈플러스 개인정보 매매 사건 피해자의 손해배상 소송을 대리하는 좌혜선 변호사(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 사무국장)는 “여러 차례 요청에도 불구하고 회사 측이 ‘자료가 폐기됐다’고 버텨 증거 확보가 어려웠다”고 말했다.

○ 적은 배상액에 ‘이겨도 손해’

피해 배상액이 지나치게 적은 것도 소비자 피해 구제의 걸림돌이다. 미국과 영국 등에서는 기업의 행위가 악의적이고 반사회적인 경우 실제 손해액의 몇 배에 달하는 배상을 하도록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국내에서는 기업의 갑질과 관련된 하도급 거래와 기간제 근로자 파견, 그리고 금융기관 대량 개인정보 유출 사건 이후 신용 및 개인정보 이용 등 관련 피해에 한해 제한적으로 도입된 상태다.

국내 법원이 정신적 피해와 같은 무형의 피해를 인정하는 데 인색하다 보니 소비자 입장에서는 ‘이겨도 손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폴크스바겐 사건의 손해배상 소송을 대리하는 법무법인 ‘바른’의 하종선 변호사는 “배상액이 적다 보니 ‘지더라도 일단 재판을 해 보자’는 게 외국 기업들의 속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도 소비자 집단소송제를 도입하자는 논의는 1993년 시작됐다. 하지만 2004년 증권 관련 집단소송법이 제정됐을 뿐 일반적인 소비자 피해에 대해 이 제도를 도입하려는 시도는 기업을 옥죄는 법안이라는 반발에 부딪혀 번번이 무산됐다.

전문가들은 “법이 안 바뀌면 기업들은 소비자를 계속 무시할 것”이라고 법 개정의 필요성을 지적한다. 서희석 부산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한국소비자법학회장)는 “소비자의 생명, 신체와 관련된 불법 행위에 대해서는 소비자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인정해야 한다”며 “기업들에 ‘잘못을 저지르면 큰일 난다’는 인식을 심어줘야 가습기 살균제 사망 사건과 같은 부도덕한 행위를 막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김호경 기자 whalefisher@donga.com·홍정수 기자·김지환 채널A 기자
#외국기업#소비자#옥시사태#소비자 피해 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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