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위직 관람’ 거부당한 北… 평양서 “철수하라” 지시 내려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2월 14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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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訪中 北모란봉악단 전격철수]베이징 공연 취소… 北中 관계 악화

북한을 대표하는 문화사절 성격의 모란봉악단이 전격적으로 베이징 공연을 취소한 것은 정상적인 국가 사이에선 좀처럼 일어나기 힘든 일이다. 단순한 문화공연이 아니라 북-중 간 ‘대형 외교활동’으로 인식돼 큰 관심을 불러 모았기에 그 충격도 더 컸다. 모란봉악단 공연 취소가 가져올 외교적 파장을 잘 알고 있는 북-중 양국은 막판까지 막후협상을 벌였지만 파국을 막지 못했다.

공연장으로 예정되어 있던 베이징(北京) 국가대극원을 기자가 찾은 때는 12일 오전 9시. 남문 쪽 주차장에는 모란봉악단과 공훈국가합창단이 탑승한 것으로 보이는 대형 버스 2, 3대가 주차돼 있었다. 이날 오전까지만 해도 공연이 예정대로 준비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정오경 모란봉악단 단원들이 갑자기 서우두 공항에 모습을 드러내면서 베이징이 발칵 뒤집혔다. 이날 낮 12시 55분 출발 예정이던 고려항공 JS152편은 단원들을 태우기 위해 공항에서 계속 대기하다 오후 4시 7분에야 이륙했다. 베이징의 한 소식통은 “단원들을 공항으로 철수시키고 이륙하는 비행기까지 3시간 남짓 잡아놓으면서 양측이 끝까지 협상을 벌인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단원들이 베이징을 떠난 지 20여 분이 흐른 오후 4시 반경에야 국가대극원 측은 공연 취소 공고를 인터넷에 올렸다. 초청 티켓을 받은 대부분의 사람들도 이때 취소 통보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초청자로부터 표를 얻었거나 암표를 산 시민들은 오후 6시경 국가대극원에 왔다가 취소 사실을 알고 허탈해했다.

이번 일로 시진핑(習近平) 국가주석의 외교 리더십에도 상처가 생겼다. 그래서인지 북한 대표단을 초청한 시 주석의 측근 쑹타오(宋濤) 공산당 대외연락부장은 막판까지 북한 측의 마음을 돌리려고 애썼다.

실제로 단원들이 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시간인 12일 오후 이들이 투숙했던 호텔에는 중국 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인 왕자루이(王家瑞·66) 전 공산당 대외연락부장과 지재룡 주중 북한대사가 드나드는 것이 목격됐다. 지 대사는 오후 8시 반경에야 전용차를 타고 호텔을 나갔으며 오후 10시 10분 베이징 기차역을 출발한 공훈합창단원들을 전송했다. 시 주석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는 쑹 부장이 주도한 이번 공연은 북-중 관계를 종전의 혈맹에서 정상국가 관계로 조정하기 위한 ‘시진핑 대북 외교’의 출발점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결국 무산되면서 양국 관계 냉각은 물론이고 시 주석의 외교 리더십까지 구겨졌다.

북한의 돌연한 변화의 원인은 10일 나온 김정은의 ‘수소폭탄’ 발언에 대한 중국의 불만과 이에 따른 중국 고위층의 ‘공연 참관 보이콧’이 가장 설득력 있는 해석으로 평가된다. 김정은의 발언은 중국의 한반도 비핵화 및 북한 핵개발 반대 원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이다. 이에 중국이 공연 참관단의 격을 낮췄고 북한이 이에 반발하면서 공연 취소 사태가 빚어진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은 시 주석이나 리커창(李克强) 총리 혹은 10월 10일 평양에서 열린 노동당 70주년 기념식에 참석한 서열 5위의 류윈산(劉雲山) 상무위원, 적어도 25명으로 구성된 정치국원 중 일부의 공연 참관을 줄곧 원했다. 중국은 한때 정치국원급의 참관을 받아들였으나 김정은의 수소폭탄 발언이 나온 이후 ‘부부장급(차관급)’ 참관을 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또 일부 외교 소식통은 중국이 김정은 찬양 일색의 공연 내용에 제동을 걸었다는 해석도 내놓고 있다. 중국이 내용 변경을 요구하자 북한이 거절했다는 것이다. 이 소식통은 “공연 형식에는 합의했으나 세세한 내용까지는 미처 조율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며 “(북한이) 김정은을 띄우기 위해 3대 세습 정당화 등을 중심으로 내용을 짰으나 중국 정부가 거부감을 보였다”고 전했다. 지 대사와 최휘 조선노동당 중앙위원회 제1부부장 등이 평양에 이를 보고했고 전격 철수 지시가 내려왔다는 설명이다.

올해 10월 류윈산의 방북으로 해빙 무드에 들어갔던 북-중 관계는 상당 기간 냉각이 불가피해졌다. 예측 불가능한 북한의 행태를 공개적으로 경험한 중국이 북한을 더더욱 믿지 못하는 상황이 굳어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공연을 수시간 남겨놓고 공연단을 전격 철수시킨 북한의 행동은 외교적 결례를 떠나 몐쯔(面子·체면)를 중시하는 중국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혔다는 여론이 지배적이다. 중국 누리꾼들은 웨이보(微博)에 김정은을 비하하는 표현과 공연 취소 비난 글을 올리고 있다.

북-중 관계가 급속도로 악화되자 진위를 알 수 없는 주장도 난무하고 있다. 교도통신은 13일 홍콩 인권단체인 중국인권민주화운동뉴스센터를 인용해 “중국이 북한에 대해 석유 지원을 중단할 가능성이 있음을 전달하고 중국군 신속대응 부대 2000명을 국경에 긴급 증파했다”며 “이에 김정은이 격노해 베이징에서 12일부터 열릴 예정이던 모란봉악단 공연을 취소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북한이 4차 핵실험이나 장거리 미사일 발사와 같은 ‘중대한 도발’을 하지 않은 상황에서 중국이 이런 제재 조치를 북한에 통보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교도통신도 진위가 확인되지 않았다고 전했다.

베이징=구자룡 특파원 bonhong@donga.com / 우경임 기자
#북한#중국#모란봉악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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