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왕의 은덕 천추에 잊을 수 없어” 日불교계 부여에 감사비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2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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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21>불교의 전래

충남 부여읍 선화공원에 서 있는 ‘불교전래사은비’(위쪽 사진)는 자신들에게 불교를 전해준 고대 백제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일본 민간인들이 모금 운동을 벌여 세운 비석이다. 자신들에게 불교를 전해 준 백제 성왕을 언급하며 ‘그 은덕을 천추에 잊을 수 
없다’고 비문에 썼다. 아래쪽 사진은 불교를 포함해 뛰어난 승려와 장인들을 일본에 보내 문화 형성에 혁혁한 기여를 한 성왕의 영정. 부여군 제공
충남 부여읍 선화공원에 서 있는 ‘불교전래사은비’(위쪽 사진)는 자신들에게 불교를 전해준 고대 백제인들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담아 일본 민간인들이 모금 운동을 벌여 세운 비석이다. 자신들에게 불교를 전해 준 백제 성왕을 언급하며 ‘그 은덕을 천추에 잊을 수 없다’고 비문에 썼다. 아래쪽 사진은 불교를 포함해 뛰어난 승려와 장인들을 일본에 보내 문화 형성에 혁혁한 기여를 한 성왕의 영정. 부여군 제공
충남 부여군 부여읍 선화공원에는 1972년 일본 민간 불교단체가 세운 높이 5.3m의 비석이 있다. 앞면에 ‘불교전래사은비(佛敎傳來謝恩碑)’라는 글자가 커다랗게 새겨져 있는데 일본 불교 신자들이 고대 백제인들에 대한 고마움을 표시한 것이다. 비 왼쪽에는 높이 3.7m의 작은 비석이 하나 더 있는데 한국어 일본어 영어 등 3개 언어로 다음과 같은 글이 적혀 있다.

‘일본 불교는 백제 26대 성왕이 전한 데에서 시작된다. 그 후부터 발전을 거듭하여 일본 문화의 정화(精華)를 이룩하였다. 일본 불교도는 그 은덕(恩德)을 천추(千秋)에 잊을 수 없어 정성 어린 감사의 뜻을 표하고자 한국 불교도의 협찬을 얻어 성왕의 옛 도읍지인 이곳에 사은비를 건립하고 한일 양국민의 영원한 친선의 징표로 삼음과 아울러 세계평화의 상징이 되기를 염원하는 바이다.’

일본인들은 당시 모금 운동을 벌여 2000만 엔을 모아 비를 건립했다고 한다.

비문(碑文)에 적힌 대로 불교는 일본인들의 정신세계와 문화생활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일본인들은 불교 신자가 아니더라도 장례는 불교식으로 치를 만큼 불교를 생활의 중심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 불교를 전한 성왕

일본에 불교를 전한 이는 비에 적힌 대로 백제 26대 왕 성왕(聖王)이다. 고대 일본 역사서인 일본서기에도 ‘552년에 백제 성왕이 승려 노리사치계를 파견하여 왜왕에게 금동석가불 1구와 번개(幡蓋·불상 위를 덮는 비단) 약간, 경론(經論) 약간 권을 보냈다’고 적혀 있다. 연도와 관련해서는 현재 학계가 의견 일치를 본 것이 앞서 소개한 사은비나 일본서기에 적힌 552년보다 14년 앞선 538년(원흥사연기, 상궁성덕법왕제설 등)이다.

538년은 성왕이 수도를 웅진(공주)에서 사비(부여)로 천도한 해이기도 하다. 선대인 동성왕과 무령왕의 정치적 안정과 왕권 강화에 힘입어 계획적으로 천도를 단행한 해에 불교를 전했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있는 역사적 사건이라고 학계는 전한다.

성왕은 일본에서 태어난 무령왕의 아들로 백제의 옛 수도인 지금의 서울 지역을 76년 만에 되찾는 등 백제 부흥을 이끈 왕이다. 왕 이름에 거룩할 성(聖)자가 들어갈 정도이니 매우 이상적인 군주의 면모를 갖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사기는 성왕에 대해 ‘지혜와 식견이 뛰어나고 결단성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성왕에 대한 평가는 일본에서도 높다. 일본서기는 ‘천도(天道)와 지리에 신묘하게 통달하였기에 명성이 사방에 나 있었다’고 적고 있으며 아예 이름 가운데에 밝을 ‘명(明)’자를 넣어 ‘성명왕’으로 일컫는다.

성왕은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며 불법(佛法)을 매우 사랑했다. 일본에 불교를 전하면서 “모든 법 중에서 가장 훌륭하며 이해하기 어렵고 입문하기 어려우며 주공(周公)과 공자(孔子)도 알지 못한다. … 사람들이 여의주를 품고 필요에 따라 모두 마음먹은 대로 되는 것과 같이 이 묘법의 보물도 그러하다”고 찬미했을 정도다.

백제에 불교가 전해진 384년 이후 불교는 백제의 중심 사상으로 자리 잡지만 그중에 제일 열심히 믿은 사람이 성왕이었다. 그는 많은 불교 사원을 지었고 중국 양(梁)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불경을 수입했으며 인도까지 승려를 유학 보내 불경을 번역시키기도 했다. 이러다 보니 법화경 열반경 유마경 반야심경 등 경전별로 전문가들이 배출되었을 정도였다.

○ 고대국가 터전을 만든 사상

백제 수도였던 사비에는 신라 승려들은 물론이고 일본 승려들까지 모여들었다. 오늘날 부여 일대에 남아있는 많은 절터와 흔적들은 사비 시기 백제 불교가 얼마나 융성했는지를 웅변하고 있다.

불교의 확산은 바로 건축기술의 발달로 이어졌다. 당시 절을 짓는 일은 지금으로 치면 최첨단 빌딩을 짓는 일에 비교할 수 있을 정도로 고도의 건축술이 집합된 작업이었다. 백제 수도 사비는 뛰어난 건축 장인들의 집합소이기도 했다.

성왕은 일본에 승려를 보내고 불경을 전한 것은 물론이고 건축 기술자들을 대거 끊임없이 보낸다. 이들이 이후 일본 문화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사찰 건축 기술을 포함해 불상 그림 등 조형 문화 전반을 혁명적 수준으로 바꿔놓았기 때문이다. 성왕 대(代)에 일본으로 전해진 고급 문물들은 일본 고대국가의 기틀을 세운 야마토 정권이 ‘아스카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우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한다.

성왕은 일본인들 입장에서는 사은비에 적힌 표현대로 ‘천추의 잊을 수 없는 사람’인 것이다. 메이지 시대 불교계 지도자였던 다나카 지가쿠(田中智學)는 “백제 성명왕의 은의는 천년에 잊어서는 안 된다(百濟聖明王の恩誼は千載に忘れてはならない)”라며 “일본이 우선 옛날의 불교 전래라는 큰 은혜에 대해 (한국에) 깊게 감사의 뜻을 나타내는 것을 가지고 한일 교류의 기초로 해야 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백제가 그토록 열심히 일본에 문화를 전파한 데에는 그 나름대로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고토(古土) 회복이라는 장대한 꿈을 꾸고 있었던 백제는 일본인들이 그토록 갈망하던 선진 문물의 세례를 안겨주는 데 대한 반대급부로 왜군을 지원받을 수 있었다.

○ 일본의 불교전쟁

당시 백제도 그랬지만 고대국가가 형성되어 가던 무렵 새로운 통치 체계를 만드는 통치자 입장에서는 사람들의 생각을 혼연일체로 모을 사상적 통일이 매우 중요했다. 인도에서 시작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 일본에까지 전파된 이유이다.

불교는 또 석가모니 왕자가 왕족이었다는 점에서 ‘왕이 곧 깨달음을 얻은 부처’라는 논리를 펼 수 있어 왕권 강화에도 도움이 되었다. 게다가 모든 사람이 불성(佛性)을 갖고 있다는 혁명적 사상은 특정 집단이나 부족이 아니라 모든 백성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는 평등사상이었다. 이러니 왕 입장에서는 왕권을 수시로 흔들어대는 토착 호족 세력이나 귀족 세력의 힘을 빼고 백성들의 지지를 하나로 모을 수 있다는 점에서 매력적이었다.

하지만 수용 과정에서 토착 세력과의 사상 충돌이 불가피했다. 특히 애니미즘 원시 신앙이 주류를 이루고 있던 일본에서는 숭불파와 배불파 간에 3년에 걸쳐 서로를 죽고 죽이는 내전이 벌어졌을 정도였다. 토착 호족 세력들은 불상을 파괴하고 절을 부수었다.

숭불파의 지도자는 한반도에서 건너간 도래인계인 소가노 우마코였고 배불파 지도자는 토착세력 모노노베였다. 475년 왜로 건너간 백제인 목만치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소가 가문은 선진 기술자들을 거느린 씨족으로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후반까지 무려 100여 년간이나 일본 조정에서 경제를 담당하며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숭불파를 이끈 소가노 우마코 옆에는 역시 또 다른 백제계 도래인 아시사주 가문 후손들과 훗날 일본의 성자(聖子)로 추앙받는 쇼토쿠 태자가 되는 우마야도 왕자도 있었다.

이에 맞선 배불파의 리더 모노노베 가문은 모노(物)가 무기를 의미한다는 데에서 알 수 있듯 지금으로 치면 군수사업가 집안으로 야마토 정권의 군사를 담당하는 씨족이었다.

불교 수용을 두고 두 파가 벌인 혈투는 결국 숭불파의 승리로 끝났다. 일본 역사는 이 사건을 ‘불교 전쟁’(정미·丁未의 변)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 역사에서는 단지 불교 수용을 넘어 귀족 세력에 대한 왕권의 승리, 토착 신앙이었던 신도(神道)에 대한 외래 문명의 승리였다는 점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사건이다.

배불파와의 3년 전쟁이 막바지에 다다랐을 때 소가노 우마코와 우마야도 왕자(쇼토쿠 태자)는 전쟁에서 승리하면 반드시 절을 세워 보답하겠다고 부처님께 맹세한다.

그렇게 해서 세운 절들은 지금까지도 일본 내 대표적 문화유산으로 사랑받고 있다. 내일부터 이어지는 이야기는 바로 이 절들에 얽힌 한일 교류의 사연들이다.

허문명 angelhuh@donga.com·권재현 기자
#성왕#불교#감사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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