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설]‘공무원 갑질’ 그냥 놔두곤 규제개혁 성공 못한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8월 5일 00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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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씨는 동물용 의약외품 제조업체를 설립하기 위해 작년 9월 농림축산검역본부에 신고 서류를 냈다. 법률에는 10일 안에 처리하도록 돼 있지만 담당 공무원은 “공장등록증명서 주소지가 상가 건물로 돼 있다” “사업지 용도가 소매점이다” 등등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3번이나 서류를 반려하면서 두 달 넘게 시간을 끌었다. A 씨가 “더 지연되면 파산할 수 있다”고 사정했더니 담당자는 “100여 건의 민원을 처리 중이니 다른 업체들에 먼저 진행해도 된다는 동의를 받아 오라”고까지 했다. 결국 A 씨는 감사원에 민원을 제기하고서야 신고를 마쳤지만 사업에 상당한 차질을 빚은 뒤였다.

A 씨를 상대한 공무원은 “교육과 출장으로 바빠서 그랬다”고 해명했지만 관련 서류는 17쪽에 불과했다. 작년 11월 한 달간 감사원이 국토교통부 등 60개 기관을 대상으로 인허가 처리 지연 등 ‘소극 행정’에 대해 감사한 결과 39건이 적발됐으니 전국 곳곳에 드러나지 않은 공무원들의 한심한 ‘갑질’이 널려 있을 것 같다.

한국승강기안전관리원에서는 엘리베이터 관련 용역 입찰 과정에서 낙찰받은 기업에 엉뚱한 서류를 요구해 계약을 포기하게 만들고, 기존 업체가 다시 계약하도록 한 일도 있었다. 기업 활동의 목줄을 쥔 현장 공무원들이 특정 업체와 유착하거나 뇌물을 받고 특혜를 준 것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한국개발연구원(KDI)이 최근 300개 기업을 조사해 보니 규제개혁의 가장 큰 문제점으로 ‘소통 및 피드백 미흡’(27.3%)과 ‘공무원의 전문성 결여’(21.3%)가 꼽힌 것을 보면 개혁이 어디서 막히는지 알 수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집권 후 세 차례나 민관 합동 규제개혁 회의를 직접 주재하면서 “규제는 쳐부숴야 할 암 덩어리”라며 전쟁을 선포했다. 그동안 규제총량제 규제일몰제 규제신문고 등 규제개혁을 위해 내놓은 시스템만 해도 수십 가지다. 정부가 운영하는 규제개혁 포털에 등록된 규제는 1만4688개로 지난해보다 600개 정도 줄었다고 한다. 그러나 현장 공무원들의 의식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민원인 입장에선 의미가 없는 일이다.

규제는 공무원들의 밥그릇이다. 대통령이나 장관이 규제개혁을 부르짖어도 6급 7급 등 아래로 내려갈수록, 지방자치단체로 내려갈수록 관련서류를 깔고 앉아 있기만 한다면 규제개혁이 될 리 없다. 법이나 시행령에는 없지만 현장을 옥죄는 ‘그림자 규제’, 공무원들의 불합리한 행정지도 관행까지 바꿔야 규제개혁이 성공할 수 있다.
#공무원 갑질#소극 행정#규제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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