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영 참여” 내세워 빈틈 공격… ‘수천억 차익’ 치고 빠지기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7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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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 방패 없는 한국기업]<上> ‘행동주의 헤지펀드’ 주의보

‘경영 참여 목적.’

지난달 4일 이 여섯 글자에 국내 산업계가 발칵 뒤집혔다.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한 사실을 전격 공시하며 주식 보유 목적을 이같이 명시한 것이다. 타깃이 재계 1위 삼성그룹이라는 점 때문에 충격파는 더 컸다.

특히 삼성물산은 5월 26일 발표된 제일모직과의 합병이 정상적으로 이뤄지면 삼성그룹 지배구조의 정점에 오를 기업이었다.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하고 무자비한 것으로 알려진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느닷없는 등장으로 삼성그룹에 비상이 걸렸다.

행동주의 헤지펀드는 과거에도 여러 차례 국내 기업들을 뒤흔들고는 수백억, 수천억 원의 돈을 챙겨 사라졌다. 기습을 받은 기업들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수개월 동안 정상적인 경영 활동에 지장을 받았다.

국내 기업들을 공격한 헤지펀드들은 고배당과 유상감자 등을 적극적으로 유도해 차익을 챙기고 나가거나 엘리엇의 경우처럼 직접적인 경영권 간섭을 통해 주식 가치를 끌어올리는 2가지 방식을 주로 사용했다. 목표는 하나. 차익 실현이다.

○ 고배당과 유상감자로 투자금 회수

1997년 말 외환위기로 국내 산업계 전체가 패닉에 빠지자 해외 투기 자본들은 이 틈을 노리고 대거 국내로 들어왔다. 한국은 그들에게 ‘놀이터’였다. 특히 부도 직전에 몰린 증권사들은 이들의 좋은 먹잇감이 됐다.

영국계 BIH펀드는 1998년 3월 대유증권(현재 골든브릿지증권)을 1100억 원에 인수한 뒤 액면가 대비 70%의 고액 배당과 유상감자 등으로 약 2000억 원을 받아 갔다. 이 과정에서 증권사 직원 550명 중 320명(58.2%)이 회사를 떠났다. 해외 투기 자본이 기업 정상화는 안중에 없고 투자 이익 실현에만 집중한다는 것을 여실히 보여 주는 사례다.

1999년에는 홍콩계 파마(PAMA)와 미국 조지 소로스의 퀀텀인터내셔널펀드도 각각 메리츠증권(26%)과 서울증권(32%) 지분을 인수한 뒤 수백억 원대 고액 배당을 챙겼다.

국내에서 가장 큰 ‘국부 유출’ 논란을 일으켰던 해외 투기 자본은 미국계 론스타다. 론스타는 기업 경영권을 확보한 뒤 기업 가치를 높여 되파는 ‘사모펀드’지만 그 행보는 강경한 헤지펀드들과 다르지 않았다. 론스타는 2003년 1700억 원에 인수한 극동건설을 2008년 웅진홀딩스에 6600억 원을 받고 매각했는데, 그 사이 유상감자와 배당금으로 챙긴 돈만 2220억 원에 달했다. 2조1716억 원을 투자했던 외환은행의 경우 2006∼2010년 평균 45.4%의 배당 성향을 유지하며 1조2000억 원의 배당금을 손에 넣었다. 2012년 하나금융지주로 넘어간 외환은행의 매각 대금은 3조9157억 원에 이르렀다.

○ 경영 간섭 통한 차익 실현

국내 대기업이 해외 자본에 넘어갈 수 있다는 위기감이 가장 컸던 것은 영국계 소버린자산운용이 2003년 4월 SK㈜ 지분 14.99%를 확보한 뒤 경영권 분쟁에 나섰을 때다. 소버린은 이듬해 3월 주주총회에서 SK그룹과의 표 대결에서 패했지만 2005년 7월 지분 매각에 따른 차익 등으로 1조 원 이상을 남겼다.

미국 월가의 ‘기업 사냥꾼’ 칼 아이칸은 2006년 2월 스틸파트너스와 연합해 KT&G 지분 6.6%를 3351억 원에 매입했다. 자산 매각, 신임 이사 선임 등 사사건건 경영에 개입하던 이 펀드는 1482억 원의 수익을 거둔 채 그해 12월 손을 털고 나갔다. KT&G는 경영권 방어를 위해 무려 2조8000억 원을 쏟아부어야 했다.

이처럼 수익을 올리는 데만 집중하는 헤지펀드들은 최근 들어 그 규모가 더욱 커지고 있다. 글로벌 헤지펀드 평가 업체인 헤지펀드리서치(HFR)가 집계한 결과 올 3월 말 기준으로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운용 자산 규모는 1275억 달러(약 144조 원)에 이른다.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말 362억 달러(약 41조 원)의 3.5배로 불어난 것이다.

○ 애플과 소니도 당한 헤지펀드

행동주의 헤지펀드의 경영 간섭은 비단 한국 기업들만의 리스크는 아니다. 애플과 소니도 앞서 2013년 자사주 매입과 사업 철수 등을 요구하는 투기 자본들의 압박에 시달렸다.

KT&G와 악연을 쌓은 아이칸은 2013년 실적 악화로 고전하던 애플의 주식을 10억 달러어치 매입한 뒤 경영진에 서한을 보내 ‘1500억 달러규모의 자사주를 사들여 주가를 띄우라’고 공개적으로 요구했다. 정보기술(IT) 기업을 전문으로 공격하는 서드포인트는 2013년 소니 지분 7%를 확보한 뒤 엔터테인먼트 사업부 분사 등으로 17개월간 소니를 압박하다 지난해 10월에야 지분을 전량 처분했다.

이러한 행동주의 헤지펀드들의 무차별 공격은 ‘장기 투자’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유럽 기업지배구조 연구소(ECGI)도 2000년 이후 세계 23개국에서 이뤄진 1740건의 행동주의 헤지펀드 개입이 대부분 주가를 지속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실패했다는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상빈 한양대 파이낸스경영학과 교수는 “행동주의 펀드들은 소액주주를 대변해 경영진의 전횡을 견제하고 비효율성을 줄이는 순기능이 있다”며 “하지만 지금까지의 사례를 보면 짧은 기간에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한 뒤 빠져나가 더 큰 피해를 남기는 경우가 많았다”고 분석했다.

:: 행동주의 헤지펀드 (Activism hedge fund) ::

특정 기업의 지분을 일정 비율 이상 확보한 뒤 배당 확대, 이사 파견 등 경영에 적극 관여하면서 보유주식 가치를 올리는 헤지펀드.

김창덕 drake007@donga.com·김지현 기자
#헤지펀드#삼성물산#엘리엇#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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