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명 기자의 달콤쌉싸래한 정치]박근혜 정부는 왜 무기력해졌나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6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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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강 투톱 김기춘-김재원 체제서 가만히 있는게 몸에 밴 與 인사들
돌격대장 사라지자 방향감각 잃어
어공들 ‘관료에 포위된 靑’ 한탄하고 관료는 “정부 목표 헷갈린다” 항변

이재명 기자
이재명 기자
‘미켈란젤로는 71세에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를 그렸고, 괴테는 평생의 역작 파우스트를 81세에 완성했다.’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의 청와대 집무실 책상에는 영어로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고 한다. 2013년 비서실장을 맡을 때 그의 나이 74세였다. 김 전 실장은 시스티나 성당 벽화나 파우스트를 남기진 못했지만 당정청 장악력의 진수를 보여줬다.

당시 정치권은 ‘김기춘-김재원(당시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현 대통령정무특보) 라인(일명 K-K라인)’이 좌지우지한다는 데 이견이 없었다. 이번 공무원연금 개혁안과 국회법 개정안 처리 과정에서 불거진 ‘대통령의 의중 논란’ 같은 일은 당시 상상할 수도 없었다. 대통령의 뜻이 궁금하다면 김 원내수석의 말에 귀 기울이면 됐다.

지난해 11월 ‘부총리 위에 원내수석’ 사건은 단적인 예다. 황우여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은 누리과정(만 3∼5세 무상교육) 예산을 교육부가 지원하기로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 여야 간사와 합의했다. 하지만 합의 10분 만에 김 원내수석에게서 “당 지도부의 의견을 따르지 않는 합의는 인정할 수 없다”는 꾸지람을 들어야 했다.

그만큼 ‘K-K라인’은 견고했고 당청은 일사불란했다. 역설적으로 조윤선 전 대통령정무수석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K-K라인’이 가동될 때 조 전 수석의 주요 업무는 어떤 법안이 언제 통과될지 보고하는 수준의 ‘정무 행정’에 그쳤다고 한다. 박근혜 대통령도 그 이상을 기대하지 않은 듯싶다. 외교관 출신을 기용한 데서 알 수 있듯, 박 대통령의 정무수석 인사 콘셉트는 ‘가만히 있어라’였으니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올해 1월 지지율이 급락하자 김 전 실장을 내보내야 했다. 이완구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급하게 국무총리로 차출했지만 ‘70일 천하’로 막을 내렸다. 비박(비박근혜)계 유승민 원내대표의 당선으로 당청 핫라인은 사라졌다. 드디어 조 전 수석이 진짜 정무수석 역할을 해야 하는 상황을 맞았다. 하지만 초선 의원 출신인 조 전 수석이 당 지도부를 움직이는 데는 태생적 한계가 있었다.

이후 여야 협상 때마다 당청은 삐걱댔다. 툭하면 당청 간 ‘진실게임’이 벌어지면서 청와대는 야심한 밤 언론사에 전화를 돌려 여론전을 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당청 간 잇단 잡음은 이병기 대통령비서실장의 입지마저 약화시켰다는 게 중론이다.

여권의 강고한 파이프라인이 부식된 상황에서 우병우의 민정수석실은 감찰의 칼날을 벼렸다. 지난해 말 ‘정윤회 동향 문건’ 유출 파문 이후 벌어진 일이다. ‘감찰 정국’에서 청와대 인사들의 생존전략은 세상과의 단절이었다. 주요 타깃이 된 어공(어쩌다 공무원·대선 캠프나 국회 보좌진 출신 행정관)들이 떠난 빈자리는 정통 관료들로 채워졌다. 산업통상자원부 출신을 민원비서관으로 발탁하는 등 내부 인사는 점점 오묘해졌다.

많은 이들이 묻는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때 그렇게 당하고도 이 정부는 왜 교훈을 얻지 못했느냐고. 하지만 불행하게도 그때보다 순발력이나 기획력은 더 떨어져 보인다. ‘K-K라인’ 체제에서 ‘가만히 있는’ 게 몸에 밴 여권 인사들은 돌격대장이 사라지자 아예 방향감각을 잃은 듯하다. 그렇지 않다면 메르스 확진환자가 나온 상황에서 어떻게 청와대가 국회법 개정안의 부당성을 알리는 데 더 열을 냈겠는가.

청와대의 한 줌 남은 어공들은 관료에 포위된 청와대의 현 상황을 한탄한다. 지난해 세월호 참사 당시 박 대통령의 진도 방문을 두고 관료 출신들은 “대통령의 안전을 담보할 수 없다”며 반대했다고 한다. 이번 메르스 행보를 두고도 관료들은 “괜히 불안을 키울 수 있다”며 반대 논리를 폈다.

그렇다고 모든 게 관료의 잘못인가. 청와대 파견 관료의 항변을 들어보자. “정부의 목표만 분명하면 오히려 관료들은 앞뒤 가리지 않고 돌진한다. 이명박 정부 때 4대강 사업이나 자원외교가 그랬고, 노무현 정부가 지방분권 정책을 추진할 때도 많은 관료가 총대를 멨다. 하지만 현 정부는 무엇을 하고 싶은지 지금도 헷갈린다.”

메르스 사태는 현 정부의 국정운영 능력에 근본적 회의를 품게 했다. 무엇을 하든 비난을 받자 청와대는 점점 강경해지고 있다. 외부의 적을 찾아 나서는 것이다. 하지만 적은 늘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다.

이재명 기자 egija@donga.com
#박근혜#무기력#김기춘#김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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