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남대총’ 주인공도 모른채 인골 다시 묻은 사연은?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29일 14시 4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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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무덤 속을 조금씩 파내려가던 고고학자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분명히 여기쯤 금관이 묻혀 있어야 하는데 어찌된 일이지?’ 도굴된 흔적이 없으니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1975년 6월 30일 오후 경주 황남대총 발굴현장에서 있었던 일이다.

당시 황남동 제98호분 혹은 신라쌍분이라고 불린 이 무덤은 신라뿐만 아니라 우리 역사를 통틀어 봐도 가장 크다. 길이가 자그마치 120m, 높이가 22.24m에 달한다. 쌍분 가운데 왕비 무덤인 북분에서는 금관이 이미 출토됐고 남분은 규모나 출토유물의 수량으로 보아 왕릉임에 분명한데도 금관이 없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더 당혹스러운 건 다음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방문이 예정돼 있었던 것. 대통령 일정은 대외비였지만 발굴조사단은 이를 대략 짐작하고 보고를 준비했다. 발굴의 하이라이트가 될 금관을 공개할 계획이었는데 정작 금관이 없다니!

이래저래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조사는 이어졌다. 당초 금관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했던 곳에는 금동관 조각이 흩어져 있었는데 신라 금동관 가운데 유일하게 비취곡옥과 순금제 수식을 갖춘 고급품이었다. 그런데 조심스레 주변을 파내던 조사자가 이내 탄성을 내질렀다. 치아가 촘촘하게 박힌 하악골과 함께 금, 유리, 비취를 엮어 만든 장식품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드디어 D-day가 밝았다. 조사단은 현장정리에 만전을 기하고 깔끔한 복장을 갖춰 입었다. 금관이 출토되지 않아 대통령의 방문이 취소될지도 모른다는 얘기도 나돌았다. 하지만 그날 오후 4시경 박 전 대통령은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던 박근혜 대통령과 함께 고분공원 정문에서부터 도보로 이동해 발굴현장을 참관하고 조사원들을 일일이 격려했다. 무덤 주인공의 유골을 보면서 깊은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금관의 빈자리를 무려 1500년 동안 썩지 않고 버텨준 왕의 뼈가 채워준 것이다.

조사단은 48편의 뼈를 수습해 서울대 의대와 경희대 치대 교수들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5개의 두개골편과 치아 12개는 무덤 주인공인 60대 남성의 유골이었고 나머지는 순장된 10대 여성의 뼈라는 결과가 나왔다. 이처럼 인골은 피장자의 성별이나 나이, 질병, 사망원인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엇을 먹었고 무덤 속에 함께 묻힌 사람들과 관계는 무엇인지에 대한 정보까지 담고 있는 특급 자료다.

그런데 지금 이 뼈는 연구소나 박물관 어디에도 보관돼 있지 않다. 황남대총을 발굴하던 시절만 해도 인골을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신라왕의 뼈를 발굴기관이 보관할 순 없다고 해 원래의 무덤 속에 다시 묻어주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유골을 안치한 석관을 집어넣고 그 위에 봉분을 쌓아올린 황남대총은 여전히 당당한 모습을 갖출 수 있게 됐다. 마치 석탑에서 부처님 사리가 출토되면 사리구만 새로 만들어 사리를 다시 봉안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신라왕의 뼈를 무덤 속에 다시 묻은 것에 대해 아쉬움이 남지만 1970년대 우리 사회의 분위기에서는 불가피한 판단이었다. 지금도 학계에서는 이 무덤의 주인공이 내물왕인지, 눌지왕인지를 놓고 열띤 논쟁을 벌이고 있다. 그 해답은 밖으로 잠시 외출했다가 거대한 지하궁전 속으로 돌아간 왕의 뼈에 담겨 미스터리로 남게 됐다.
이한상 대전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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