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백나무 숲 걸으며… 30년만에 ‘잃어버린 아침’ 되찾다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1월 29일 03시 00분


코멘트

[밀레와 함께하는 ‘이야기가 있는 숲 길’]
‘LA올림픽 유도 金’ 하형주 교수의 전남 장성군 축령산 트레킹

“편백나무는 나의 유도 파트너였습니더.” 한국 유도의 영웅 하형주 동아대 교수가 20일 편백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전남 장성군 축령산 ‘치유의 숲길’에서 주변 경관을 둘러보고 있다. 하 교수는 동아대 재학 시절 편백나무를 훈련 파트너로 삼아 다리 기술을 연마했다. 장성=신원건 기자  laputa@dogna.com
“편백나무는 나의 유도 파트너였습니더.” 한국 유도의 영웅 하형주 동아대 교수가 20일 편백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전남 장성군 축령산 ‘치유의 숲길’에서 주변 경관을 둘러보고 있다. 하 교수는 동아대 재학 시절 편백나무를 훈련 파트너로 삼아 다리 기술을 연마했다. 장성=신원건 기자 laputa@dogna.com
《 한국 스포츠를 대표하는 전설적인 스타로 1984년 로스앤젤레스(LA) 올림픽에서 한국 유도 역사상 두 번째 금메달(첫 번째는 LA 올림픽 안병근)의 영광을 안은 하형주 동아대 교수(53·경찰무도학과 스포츠심리학 전공)는 아침을 무서워한다. 현역 시절 매일 새벽부터 시작되는 강도 높은 훈련에 대한 두려움이 트라우마(정신적 상처)처럼 남아있다고 한다. 하 교수가 현역에서 은퇴해 대학 강단에 선 지도 30여 년이 흘렀다. 하지만 아직도 그는 아침에 절대 골프 약속을 잡지 않는다. 키 184cm, 체중 100kg에 가까운 거구가 아침이 무서워 지난 10여 년간 아침 식사를 해본 적도 없다고 한다. 1월 20일, 웬일인지 하 교수는 아침 일찍 산뜻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밤새 새벽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고 했다. 이날은 전남 장성군과 전북 고창군 경계에 있는 축령산 ‘치유의 숲길’ 9.7km를 걷기로 한 날이었다. 하 교수는 잃어버린 ‘아침’을 되찾았다. 축령산 치유의 숲길은 수령 50년 이상의 편백나무가 가득한 곳이다. 편백나무는 다른 나무보다 특히 피톤치드 성분을 다량으로 내뿜는다. 피톤치드는 나무가 해충과 병균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내뿜는 자연 항균 물질로 스트레스 해소, 심폐기능 강화, 살균 효과가 있다. 》

○ 유도는 내 자신을 속일 만큼 신비스럽고 고통스러웠다

해발 620m의 축령산 경관은 한 폭의 수채화 같았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과 맞닿은 산의 경치가 한겨울을 잊게 했다. 날씨가 포근했다. 하 교수의 몸에서도 열이 났다. 땀이 났다.

“신비스러운 건 유도나 산이나 같나 봅니더.”

축령산으로 진입하는 추암마을 길에서 진주 출신의 경상도 사나이는 유도복을 고쳐 입듯 등산복 상의 앞쪽을 단정히 여몄다. 옷을 여미던 오른손 네 번째 손가락 손톱이 현역 시절 입은 피멍으로 아직도 검붉었다.

하 교수는 처음에 유도가 신비롭게 다가왔다고 했다. 하 교수는 “어릴 때 축구도 하고, 씨름도 잘했는데 상대 눈을 보고 대결하는 유도는 다른 운동과는 느낌이 달랐다”고 회상했다. 열여섯 늦은 나이에 유도 선수가 된 하 교수는 대한민국 중량급 최고의 스타가 되기까지 경쟁자들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운동에 매진했다.

“거창한 목표는 없었어요. 매일 매일 ‘자고 일어나서 처지지 말자’고 마음을 다진 게 전부였죠.”

추암마을과 대덕마을의 평탄한 길을 지나니 축령산 정상으로 연결되는 가파른 오르막길이 나왔다. 고교 3학년생이던 하 교수가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을 앞두고 첫 국가대표로 선발된 뒤 맞은 유도 인생의 ‘가파른’ 전환기와 닮았다.

국가대표로 동아대에 입학한 후에는 95kg 이하급에서 적수가 서서히 눈앞에서 사라져 갔다. 하 교수는 “대학 3, 4학년이 되니까 선배들이 하나둘씩 은퇴하더니 후배들도 ‘행님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던져 주이소’라고 읍소했다”며 껄껄 웃었다.

성장세가 두드러질 무렵 한계가 찾아왔다. 엄청난 훈련량을 견디기 어려웠다. 목표를 세우고 우직하게 실천하던 경상도 사나이도 자제력을 잃고 흔들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했다.

“한 번은 태릉선수촌 훈련이 너무 고돼서 비누를 눈 안에 넣어 비빈 뒤 눈병이 걸렸다고 속여 휴가를 받은 적이 있지요. 그런데 태릉선수촌 정문을 나가자마자 후회가 되더라고요. 다음 날 나 자신을 속였다는 마음에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 스포츠 진리 깨달은 올림픽

축령산 정상은 사방이 탁 트여 있다. 정상으로 뻗어 온 능선과 나무로 빼곡한 숲 구석구석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 교수와 동행한 세계적인 산악인 엄홍길 대장은 “이곳 땅 주인이었던 임종국 씨(1915∼1987)가 사재를 털어 애지중지 일군 숲이라 그런지 경건함이 느껴진다”고 엄지를 치켜세웠다.

하 교수에게 1984년 LA 올림픽 금메달은 눈물겨운 노력으로 만들어낸 대가다. 대회 초반 부상을 입고서도 자신감 하나로 세계를 제패했다. 하 교수는 LA 올림픽을 통해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는 진리를 깨달았다. 하 교수는 “올림픽 전부터 세계 정상급 선수들의 장점과 단점, 심판들의 성향까지 파악해 훈련 일지를 적고 분석해 어떤 강자와 토너먼트 첫 판에 붙어도 진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며 “훈련량은 자신감과 비례한다는 진리를 알게 됐다”고 말했다.

LA 올림픽의 기세를 이어 하 교수는 1986년 서울 아시아경기에서도 라이벌 스가이 히토시(일본)에게 통쾌한 복수전을 펼치며 금메달을 따냈다. 1년 전 1985년 서울 세계유도선수권 결승에서 진 빚을 후련하게 되갚았다. 1차전에서 졌던 기술을 그대로 시도하면서 스가이를 유도한 뒤 모두걸기로 매트에 쓰러뜨렸다.

하지만 금메달은 떼어 놓은 당상이라던 1988년 서울 올림픽에서 그는 악몽을 경험했다. 1회전에서 벨기에 로베르트 판데 바르에게 충격의 한 판 패를 당해 탈락했다. 유도 선수로 전성기를 달리던 하 교수의 올림픽 2연패를 누구도 의심하지 않았던 상황이라 충격은 컸다.

“방심한 게 아니라 긴장을 많이 했어요. 김재엽과 이경근 선수가 대회 시작부터 금메달을 따냈기 때문에 부담이 엄청났어요.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을 정도로 참담했습니다.”

60kg 이하급 금메달리스트인 김재엽이 시상식에서 입었던 것과 똑같은 한복을 마련했던 하 교수는 한복을 꺼내 입지도 못하고 남몰래 구석에서 눈물을 흘렸다.

하 교수에게는 공개하고 싶지 않은 징크스가 있다. 안방 대회, 특히 최근 새롭게 단장한 장충체육관에서 약했다는 것이다. 1985년 장충체육관에서 열린 서울 세계유도선수권에서 은메달에 그쳤고, 서울 올림픽에서도 허무하게 무너졌다. 금메달을 딴 서울 아시아경기는 유도 경기가 88체육관에서 열렸다. 하 교수는 “사실 서울 올림픽 전에 유도 경기장을 변경해 달라고 말하고 싶었다. 건방지다는 소리를 들을까봐 참았는데 나중에 후회가 컸다”고 털어놨다.

서울 올림픽을 경험하며 그는 마음을 다스리는 것도 실력임을 뼈저리게 느꼈다. 당시 결승전에서 만날 것으로 예상했던 라이벌 스가이도 반대편 조에서 1회전 탈락했다. 하 교수는 “올림픽이 끝난 뒤 10년이 지나 스가이를 만난 자리에서 ‘왜 떨어졌냐’고 물으니 ‘겁이 나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하더라”며 “우리 앞 세대에서는 메달을 딴 선배가 없어서 큰 대회를 앞두고 심리적으로도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잘 몰랐다”고 했다.

하 교수의 전공은 스포츠심리학이다. 서울 올림픽의 쓰라린 경험은 값진 제2의 인생을 열게 해줬다.

○ 체육이 정책 우선순위 밀리는 꼴을 볼 수가 없다

축령산 정상에서 금곡마을로 내려오는 길은 미끄러워 춤을 추게 된다. 거구인 하 교수가 내리막을 타니 지축이 울리는 듯했다.

하 교수는 현역 시절을 정리하는 은퇴 내리막길에서 수없이 마음이 흔들렸던 기억을 꺼냈다. 서울 올림픽의 충격이 은퇴를 재촉했던 시기다. 하 교수는 “안병근(용인대 교수·전 유도 국가대표 감독)과 매일 술을 마셨다. 그러면서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까지 가자고 했다가도 다음 날에는 후배들을 위해 길을 열어주기로 마음을 바꿨다. 생각이 수시로 변했다. 그렇게 딱 열흘 고민하고 결국 은퇴를 택했다”고 말했다. 은퇴 이후 강단에 선 하 교수는 한동안 슬럼프에 빠졌다.

“유도 수업을 해야 하는데 유도복을 입기도 싫었습니다.”

땀인지 눈물인지 눈가에는 잔잔한 물기가 어렸다. 은퇴 후 하 교수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위원에 대한 꿈을 키우면서 정치에 입문했다. 1996년 올림픽 금메달리스트로는 처음으로 광역시의원(부산)이 됐다. 2008년 이후에는 꾸준히 부산 사하와 서구에서 국회의원 공천을 신청했다. 스포츠를 정책의 우선순위로 올려놓고 싶은 열망 때문이었다. 체육이 점점 외면당하는 학교 교육도 불만이었다. 국민의 의료비 지출이 크게 늘어나는 것도 못마땅했다.

하 교수는 “사회 정의와 룰은 몸으로 배워야 잊어버리지 않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스포츠”라며 “스포츠가 국가 정책과 의료, 교육 분야에서 후순위로 밀려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며 걸음을 재촉했다.

○ 팬들의 사랑 더 큰 힘으로 사회에 돌려줄 것

정상에서 내려와 다시 출발 지점인 추암마을로 향하는 2.2km의 길은 빼곡하게 편백나무로 둘러싸여 ‘숲내음 숲길’로 이름이 붙었다. 편백나무에서 뿜어내는 향이 도시의 먼지로 꽉 막힌 코를 시원하게 뚫어낸다.

하 교수는 편백나무와 인연이 깊다. 동아대 재학 시절, 같은 체급 동료가 없었던 하 교수의 연습 상대는 다름 아닌 편백나무였다. 동아대 뒷산에 올라 편백나무 기둥을 상대로 안다리 기술을 연마하면서 허벅지를 단련시킨 기억이 새롭다.

“뒷산 사찰의 주지스님이 나무 죽는다고 총장님께 항의하기도 했죠. 스님이 사정을 알고 난 뒤에는 아예 부러뜨리라고 하셨습니다. 하하.”

편안하게 걷는 지금이 고맙다. ‘왕발’(310cm)이라는 별명답게 어린 시절에도 맞는 신발을 찾지 못해 늘 발가락에 멍이 들었던 그다. 하 교수는 “중학교 2학년 때 누님이 부산 국제시장에서 미군 신발을 사왔는데 너무 기뻐 끌어안고 잤던 기억이 난다”며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편안하게 걷도록 해준 팬들이 고맙다. “선수 생활, 그리고 28년 교수로 지내는 동안 얼마나 유혹이 많고 고비가 많았겠습니꺼. 그때마다 힘을 주고 격려해준 팬들과 지인들이 너무 많아요. 저의 책무는 더 큰 힘을 모아서 후배나 제자, 나아가 사회에 돌려주는 겁니다.”

편백나무 숲 한가운데서 ‘인생 2장’을 상대하기 위해 힘을 충전한 하 교수의 통쾌한 웃음이 울려 퍼졌다.

장성=유재영 기자 elegant@donga.com
#편백나무#하형주 교수#축령산#트레킹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