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급보안’ 핵 설비자료, 北손에 넘어갔나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2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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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전 해킹 파장]
정부, 北연계 가능성에 촉각

자신을 ‘원전반대그룹’이라고 밝힌 해커가 인터넷에 올린 한국수력원자력의 내부 문건들. 원대연 기자 yeon72@donga.com
국내 원자력발전소의 내부 기밀자료들을 인터넷에 유출하고 있는 ‘원전 해커’가 북한과 연계됐을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관계당국이 촉각을 바짝 곤두세우고 있다. 아직 가능성 수준이지만 만에 하나 북한 연계설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국가 1급 보안시설’인 핵(核) 설비의 각종 기밀자료를 북한이 입수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에너지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수력원자력은 “원전 안전에 문제가 없다”며 진화에 나서고 있지만 해킹 세력은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연일 기밀자료를 추가로 인터넷에 올리면서 ‘실제 테러를 감행하겠다’고 협박하고 있다.

○ 협박 메시지 첫 문장에 북한식 표현


자신을 ‘원전반대그룹’으로 지칭한 원전 해커는 21일 트위터에 원전 내부 설계도 등 한수원 내부 기밀자료를 추가로 공개하면서 ‘청와대 아직도 아닌 보살…’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851자 분량의 위협 메시지를 올렸다.

‘아닌 보살’은 시치미를 떼고 모른 척한다는 뜻의 말로 국립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에 속담으로 올라 있지만 북한에서 훨씬 자주 쓰이는 표현이다. 한 탈북자는 “딴청 부린다는 뜻으로 북한에서 일상적으로 쓴다”고 설명했다. 북한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올 10월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남한이) 미국 상전의 핵위협에 대해서는 아닌 보살하고 동족에 대해 핵위협을 운운하는 것은 그야말로 철면피한 궤변”이라고 언급한 적이 있다.

이에 대해 정부 고위 관계자는 “해킹 세력이 북한식 표현을 쓴 사실을 확인했다”며 “북한 연계설 등 여러 가능성을 열어두고 수사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국정원의 관계자는 “소니와 한수원의 해킹 시점이 비슷한 점을 예의주시하며 사안을 지켜보고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해커가 수사의 혼선을 유도하기 위해 일부러 북한식 표현을 썼을 가능성도 제기된다. 이 해커는 위협 메시지의 끝 부분을 ‘하와이에서 원전반대그룹’이란 말로 맺으며 자신이 미국에 있다고 주장했다.

해킹 세력이 “자료를 넘겨주는 문제는 (원전) 가동 중단 후에 뉴욕이나 서울에서 면담을 갖고 해도 된다. 돈은 어느 정도 부담해야 할 것”이라며 금전적 대가를 요구하는 듯한 발언을 한 데 대해서도 의혹이 제기된다. 국가의 기밀자료를 해킹하고, 원전 가동 중단을 요구해 원전반대 세력인 것처럼 행세하면서 돈을 요구하는 것 역시 정체를 숨기기 위한 위장술일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 앞뒤 안 맞는 한수원 해명

한수원 측은 유출 자료에 대해 “내부교육 등에 쓰는 일반적인 자료일 뿐 안전을 위협할 만한 내용은 담기지 않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공개된 자료의 내용을 보면 한수원의 이 같은 해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날 인터넷에 올라온 ‘자체 비밀 세부분류지침’을 보면 한수원은 문건 첫 페이지에 ‘이 지침은 보안에 유의해서 관리할 것’ ‘회사 이외의 유출을 금함’ ‘이 지침을 복사할 경우 사본 근거를 유지할 것’ 등의 주의사항을 넣어 보안관리를 철저히 하라고 주문했다. 한수원은 문건에 담은 비밀내용의 목차를 열거하며 기밀수준에 대해 “누설될 경우 국가안전 보장에 막대한 지장을 초래할 우려가 있다”고 정의했다.

해킹 세력이 고리 1, 3호기, 월성 2호기를 지목하며 가동 중단 협박을 가한 것에 대해서도 한수원 측은 “수명만료 시점이나 기술적인 측면에서 이 원전 3기는 공통점이 없다. 왜 이 3기의 가동을 중단하라는 건지 파악하지 못했다”고 설명했다.

유출 자료 상당수는 원전에 대해 잘 모르는 일반인이 봤을 때 무슨 내용인지 알기조차 힘든 복잡한 설계도다. 전문가들은 현재까지 나온 자료만 놓고 보면 원전 안전을 위협하는 수준은 아니지만 유출 사실 자체를 ‘별일 아니다’라고 언급하는 정부의 태도는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정범진 경희대 교수(원자력공학)는 “유출된 도면은 테러나 상업적 도용 측면에서 치명적인 자료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며 “다만 한수원의 보안 체계 문제로 유출 위험이 있을 수 있는 만큼 보안시스템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정부는 해커가 요구한 원전 가동 중지나 회수 대가로 금전을 제공하는 것은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고 일축했다.

이상훈 january@donga.com·조숭호 / 세종=문병기 기자
#원전 해킹#북한#원자력발전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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