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언정치 ‘레드카드’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6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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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혁신 ‘골든타임’ 2부]<4>답답한 정치, 제대로 바꾸자
(中)고질병 고치려면

“공증을 받아서 할 수도 없고….”

당의 혁신을 이끈다는 목표로 출범한 새누리당 보수특별혁신위원회의 핵심 의원은 보수 혁신위 활동에 대해 이같이 탄식했다. 그는 “혁신을 외치면서 계속 보여주기 식 혁신만 하고 있다”며 “(혁신의) 합의를 깼는데도, 답답한 것이, 어떻게 책임을 물을 수가 없다”고 하소연했다. 끊임없이 반복되는 정치권의 ‘말뿐인 혁신’에 대한 자조인 셈이다.

○ 돌아서면 잊는 약속

지난달 30일 “선거구별 인구 편차를 2 대 1 이하로 조정하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나온 뒤 국회에서는 선거구 개편안을 결정할 기구를 어떻게 마련할 것인지를 두고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다.

“선거관리위원회 등 독립적인 외부 기구에 개편 문제를 맡겨야 한다” “조정 대상 지역구가 아닌 여야 국회의원들이 참여해 논의하자” “여당과 야당, 외부 인사가 참여하는 기구를 결성하자” 등 다양한 주장이 쏟아지고 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한 답은 이미 나와 있다. 새누리당과 새정치민주연합은 이미 2012년 국민들에게 약속한 내용이 있기 때문이다.

새누리당은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 공약 자료집에서 ‘선거구 획정의 자의성을 방지하기 위해 선거구획정위원회를 출마 당사자가 아닌 100% 외부 인사로 구성한다’고 밝혔다. 새정치민주연합(당시 민주통합당)도 2012년 총선 공약 자료집에서 ‘선거구획정위원회를 독립기구화하여, 국회는 획정위가 제출한 선거구 획정안에 대해 가부(可否)만을 표결하도록 함’이라고 했다. 여야 모두 국회의원들을 배제하고 독립된 외부 기구에 선거구 획정을 맡기겠다고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정작 선거구제 논란이 본격화되자 여야는 모두 자신들이 한 약속은 까맣게 잊은 듯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선거구획정위원회 외부 설치에 대해 새누리당 이완구 원내대표는 “논의가 필요하다. 지금은 이야기할 단계가 아니다”라고 했고 새정치연합 우윤근 원내대표 또한 “논의할 점이 많다”고 했다.

○ 스스로 한 약속도 모른 척

정치권이 국민들에게 한 약속을 도외시하는 것은 비단 이뿐만이 아니다. 올해 6·4지방선거 전, 논란이 뜨거웠던 ‘기초공천제 폐지’는 사실 여야가 모두 국민들에게 “폐지하겠다”고 약속한 내용이다. 여당은 2012년 대선 당시 “기초자치단체의 장과 기초의원의 정당공천 폐지”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야당 또한 대선 공약으로 “기초의원의 정당공천제 폐지”를 약속했다.

그러나 2014년 1월, 새누리당은 기초선거 정당공천 폐지와 관련해 “정당의 역할과 기능을 제한할 경우 헌법에 위배된다”며 슬그머니 물러섰다.

여당의 결정에 “대선 공약 파기”라며 강하게 반발했던 새정치연합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안철수 당시 공동대표가 “국민과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며 기초공천 폐지를 주장했지만 의원들의 거센 반발로 무위에 그쳤다.

국회 윤리특별위원회에 외부 인사를 참여시키겠다며 경쟁적으로 내세웠던 공약도 마찬가지다. 국회 윤리특위는 국회의원의 국회법 위반, 품위 손상 등을 심사하고 징계하는 곳이다. 여야는 2012년 총선과 대선에서 국회 윤리특위와 관련해 각각 “100% 외부 인사로 충원”(새누리당), “50%를 외부 인사로 구성”(새정치연합) 공약을 경쟁적으로 내걸었다. 그러나 2014년 현재 국회 윤리특위 위원 15명은 모두 현역 국회의원이다.

이에 대해 야당의 한 초선 의원은 “공약이라는 것은 국민과의 약속인 만큼 실현 가능성, 후속 대책 등을 면밀히 생각하고 발표해야 하는데 여야 모두 ‘일단 이기고 보자’는 생각에 큰 고민 없이 공약을 남발한다”며 “국회에 들어와 보니 국민들이 정치에 가지는 불신과 반감이 근거 없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느낀다”고 지적했다.

○ 다시 또 ‘혁신’ 꺼내 든 정치권

이미 ‘양치기 소년’으로 전락해버린 여야는 최근 혁신 구호를 다시 꺼내 들었다. 새누리당은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를 위원장으로 하는 보수혁신위원회를, 새정치연합은 원혜영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정치혁신실천위원회를 설치했다.

여야가 혁신위를 통해 경쟁적으로 혁신방안을 내놓고 있지만 벌써부터 당내 반발이 나오는 등 기득권의 저항이 거세다. 새누리당 보수혁신위는 9월 출범 이후 △출판기념회 전면 금지 △국회의원 세비 동결 △체포동의안 기명 표결 및 회기 중 영장실질심사 자진 출석 등의 의제를 논의했다. 보수혁신위는 11일 의원총회에서 이 같은 내용을 보고했지만 새누리당 의원들은 ‘인기영합적’ ‘과잉 금지’라는 표현을 써가며 강하게 반발했다.

새정치연합 정치혁신위도 △관례적으로 야당이 행사했던 국회 도서관장 추천권 폐지 △당 윤리위원회 강화 △비례대표 후보 상향식 선출 △전당대회 특정 후보 공개 지지 금지 등의 혁신안을 당 비상대책위원회에 보고하고 의결했다. 그러나 당장 내년 2월 전당대회를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후보 지지 금지 등의 규정이 실효성을 발휘할지는 미지수다.

김형준 명지대 인문교양학부 교수는 “진짜로 혁신하려면 비대화된 중앙당, 특정인에게 집중된 의사결정 구조 등 본질적인 부분에 대한 개혁을 논의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 툭하면 여야합의 뒤집고 국민 무시 ▼

19대 국회 20여건 합의했지만 지도부 흔들기 탓 제때 처리못해


또 하나 빼놓을 수 없는 국회의 고질적 병폐는 합의를 안 지키는 것이다. 빈번한 여야의 합의 파기는 정치에 대한 국민의 불신과 혐오를 불러일으키는 주요 원인이다.

여야는 19대 국회의 임기가 시작된 2012년 5월 30일 이후 20여 건의 합의 문서를 작성했지만 약속은 좀처럼 지켜지지 않았다. 대표적 사례는 ‘국정감사 분리 실시’ 무산이었다.

당초 여야는 6월 원내대표 합의를 통해 8월 26일부터 9월 4일까지 1차 국감을 실시하고, 10월 1일부터 열흘간 2차 국감을 진행할 예정이었다. 국감을 10월에 몰아서 하다 보니 내실 있는 국감이 이뤄지지 않고 내년도 예산안을 충실하게 심사할 시간도 부족했다는 지적이 나오자 모처럼 여야가 의기투합을 한 것.

하지만 그 약속은 끝내 지켜지지 않았다. 세월호 특별법 제정을 둘러싼 정국 대치가 장기화하면서 국정감사 분리 실시를 위한 ‘국정감사 및 조사법’을 개정하지 못하면서 분리국감은 없었던 일이 되고 말았다. 국감은 더 부실하게 진행됐고 여론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기초연금법 처리도 3개월이나 늦어졌다. 여야 원내대표는 “기초연금 관련 법안을 2월 국회에서 합의 처리하도록 노력한다”고 합의했지만 여야가 첨예하게 맞서면서 5월 2일에서야 가까스로 처리됐다.

가장 황당한 사례는 ‘세월호 침몰사고 피해학생 대학입학지원 특례법’ 처리 불발이다. 이 법안은 세월호 참사로 인한 수업 공백과 불안정한 심리 상태 등으로 정상적인 입시 준비가 어려웠던 단원고 학생들을 위한 조치로 여야는 8월 13일 본회의에서 처리하기로 했다. 하지만 세월호 특별법 협상이 난항을 겪으면서 법안 통과 시기를 놓쳤고 결국 처리가 무산됐다.

세월호 참사 피해자 및 피해 지역에 대한 배상과 보상 및 지원에 대한 논의도 지지부진하다. 당초 여야 원내대표는 8월 19일 합의문에서 ‘배상·보상 문제는 9월부터 논의를 시작한다’고 명시했지만 공수표가 됐다. 결국 여야 원내대표는 두 달 뒤인 10월 31일에야 ‘논의를 즉시 실시한다’고 다시 합의했다.

새정치민주연합 초선 의원은 “의원들이 기본적으로 당 지도부를 인정하거나 존중하지 않고 있다”면서 “여야 협상안에 대해 무조건 목소리만 높이고 지도부 흔들기를 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연세대 이종수 행정학과 교수는 “정치권이 보수 또는 진보의 의견을 수렴하는 기능을 제대로 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야가 합의를 하더라도 매번 번복되는 것”이라며 “기본적으로 약속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법치주의에 대한 인식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한상준 기자 alwaysj@donga.com   
고성호 기자 sungho@donga.com
#식언정치#국회#국회의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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