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미석의 詩로 여는 주말]서울 뻐꾸기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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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르조 모란디의 ’정물’(1939년)
조르조 모란디의 ’정물’(1939년)
서울 뻐꾸기
강우식(1941∼)

새벽 4시에 일어나
그 옛날처럼 평범하게 우는
서울 뻐꾸기 소리를 듣는다.

내 집 근처에도
숲과 산이 있음을
새삼 일깨워준다.

창을 여니 새벽별들은
내 막내딸의 초롱한 눈빛되어
가슴을 뚫고

내 인생에 있어
잊고 산 귀중한 것들은
이렇게 평범한 것들이었구나.


해 지구촌 ‘패션남녀’를 사로잡은 것은 ‘놈코어(normcore)’란 신조어였다. 노멀(normal)과 하드코어(hardcore)를 합친 말인데, 꾸미지 않은 듯 평범한 옷차림을 추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련된 멋쟁이들도 해마다 바뀌는 유행을 따르는 것이 지겨워진 탓일까. 검정 터틀넥 스웨터에 청바지를 즐겨 입었던 ‘애플’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난데없는 스타일 아이콘으로 부상했다. 유별난 패션으로 남들의 시선을 끌기보다 무심한 듯 수수한 패션이 대세로 등장한 것이다.

‘놈코어 트렌드’는 사람들에게 홀대받았던 평범함을 새롭게 바라보는 관점을 제시한다. 어디 패션만 그런가. 일상용품 디자인에서는 2000년대 중반부터 한발 앞서 평범함의 가치를 주목했다. 지극히 평범하기에 되레 특별한, 이른바 ‘슈퍼노멀(supernormal)’ 개념이 각광받기 시작했다. 가구에서 생활소품까지 독특한 장식과 디자인을 배제하고 기능에 집중한 편안한 디자인이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다.

강우식 시인의 ‘서울 뻐꾸기’는 평범함 속에 진리가 있다는 말을 떠오르게 한다. 늘 곁에 있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것을 재발견하도록 돕는다. 익숙함 속에 파묻힌 보석을 꿰뚫어 보는 시인의 혜안이 탁월하다. 그제 덕수궁미술관에서 개막한 ‘모란디와의 대화’전은 평범한 사물의 존재감이 빚어내는 경건한 감동과 만나는 자리다. 이탈리아 화가 조르조 모란디(1890∼1964)는 ‘20세기 유럽회화의 성자’로 존경받는다. 평생 고향을 떠나지 않고 볼로냐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옹기종기 모여 있는 화병과 그릇들을 그리고 또 그렸다. 온갖 미술사조와 유행에 눈길 주지 않고 정물화에 전념한 것은 “사람들이 만든 병, 그릇, 상자들보다 더 인간적인 것은 없다”는 믿음 때문이었다.

화가의 금욕적 삶과 소박한 작품은 시공과 장르를 초월해 현대 예술가에게 영감을 주고 있다. 닮은 듯 미묘하게 다른 그림들은 불가해한 매력을 뿜어낸다. 작가의 붓이 일상을 실존적이고도 형이상학적 차원으로 승화시킨 덕이다. 조각가 최인수 서울대 명예교수는 “그의 그림에서는 세상으로부터 물러나 있는 듯한 분위기, 우수의 감각과 알 수 없는 기쁨이 교직되고 모호하면서도 지속적인 감동이 있다”고 찬사를 보낸다.

따분하거나 고리타분하다며 우리 자신의 평범함을 부끄럽게 여기거나 주변의 평범한 것을 밀쳐내지는 말자. “우리 자신들, 단순하고 검박한 모든 사물, 모든 것이 신비이다.” 화가의 내밀한 육성이 녹아든 그림들이 가장 평범한 것이 가장 아름답다는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내가 잊고 산, 평범하지만 귀중한 것은 무엇인가.

고미석 논설위원 mskoh119@donga.com
#서울 뻐꾸기#조르조 모란디#정물#놈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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