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정지은]서울을, 한국을 떠나고 싶다는 사람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22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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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은 사회평론가
정지은 사회평론가
또 한 명의 지인이 제주도로 떠났다. 이미 주변에서만 다섯 가족 넘게 떠났으니 제주로의 이주 소식은 이제 뉴스 축에도 못 낀다. 지난해 타 지역에서 제주로 이주해 온 순유입 인구가 7824명을 기록했고 올해 2월에 이미 순유입 인구가 6597명이라는 통계만 봐도 제주 이주가 하나의 흐름인 것만은 확실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갑자기 제주로 가기 시작한 걸까. 사실 제주 이주가 해답은 아니다. 제주로 간다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게 아니라는 것쯤은 다들 알고 있다. 중요한 건, 알면서도 떠난다는 거다. 직장을 제주에 구해 떠난 사람도 있지만 멀쩡한 직장을 그만두고 가는 경우도 여럿이다. 사연은 달라도 이렇게 떠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키워드는 ‘탈출’이다. 이들은 “뭐 먹고 살려고?”를 묻는 사람들에게 “어떻게든 되겠지”라며 어깨를 으쓱하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래도 제주는 소득에 맞춰 소비를 줄여도 살 수 있는 곳이다. 아무리 아껴 써도 상당한 고정비용을 지출할 수밖에 없는 대도시와는 차원이 다르다. 그러니까 제주는 ‘경쟁’과 ‘속도’의 대명사 한국을 떠나고 싶지만 당장 떠날 수 없는 사람들이 현실적으로 선택하는 일종의 완충지대인 셈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 북유럽 국가로 이민을 떠나거나 이민을 고민하는 사람이 부쩍 늘고 있다지 않은가.

그도 그럴 것이 요즘 한국의 상황을 보면 어릴 적 놀이가 떠오른다. 언덕처럼 쌓은 모래에 젓가락을 꽂고 누가 가장 먼저 쓰러뜨리는지를 겨루던 놀이 말이다. 어차피 놀다 보면 젓가락은 쓰러질 수밖에 없다. 결론은 정해져 있는데 누가 모래를 먼저 많이 가져가느냐에 따라 패자가 결정된다. 앞사람이 모래를 많이 가져가버리면 젓가락은 쓰러질 수밖에 없으니, 내 차례에 젓가락이 쓰러지지만 않으면 되는 일종의 ‘폭탄 돌리기’다.

‘더 나은 미래’를 꿈꾸는 것은 고사하고 ‘현상 유지’만으로도 감사한 상황이 계속되다 보니 사람들은 각자의 입장에서 모두가 억울하고 화가 나 있다. 거리에서 ‘누구든 나를 건드리면 바로 화를 내주겠어!’ 같은 표정과 태도가 자주 보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다들 “바쁘다”를 입에 달고 열심이지만 도대체 뭘 위해 바쁜 건지 생각할 시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아니, 생각하기 시작하면 더 머리가 아프니 “바쁘지?”를 인사말처럼 서로에게 건네며 뛰어다니는 걸 선택한 것일지도 모른다.

게다가 바쁘게 일한다고 보상이 제대로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세계에서 물가가 가장 비싼 도시는 더이상 도쿄가 아니라 서울이다. 인건비는 그대로인데 생존에 필요한 기초비용과 항목은 늘어나기만 하는 ‘고비용 사회’인 한국에서의 삶이 여유롭기란 불가능하다. 2009년부터 2013년까지 연평균 실질임금 상승률은 1.28%로 같은 기간 연평균 경제성장률 3.24%의 절반을 밑돈다. 4인 기준 가구의 연평균 가계통신비 부담액이 200만 원에 육박한다는데 1년에 200만 원만큼이라도 소득이 꾸준하게 증가하는 가구가 얼마나 되겠는가.

최근 유럽 여행을 다녀온 친구는 “한국이 다른 건 몰라도 물가만큼은 확실하게 세계화됐다”며 한마디 덧붙였다. 어차피 생활비도 비슷해졌는데 이참에 한국을 떠나서 사는 걸 진지하게 고려해보기로 했다고. 세월호 참사를 겪으면서 막연하게 ‘내 자식만큼은 웬만하면 이 나라에서 살지 않게 하겠다’던 생각이 확실해졌단다. “마음을 굳히고 나니 영어 공부가 저절로 된다”며 웃는 친구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한국식으로 ‘월화수목금금금’ 일하면 어디에서든 여기에서보다 나은 삶을 살 수 있다며 떠날 준비를 서두르는 후배에게도 할 말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떠날 수 있는 사람에게도 할 말이 없는데, 아무 데도 갈 수 없는 사람에게 할 말이 있을 리 만무하다.

지금부터라도 ‘이 땅에 발 딛고 살기 위한’ 미래를 만들어내지 않는다면 떠나는 사람들의 행렬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잃고 있으니 말이다.

정지은 사회평론가
#서울#고비용 사회#물가#세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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