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자의 생각돋보기]서양을 통해 읽은 일본 미학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1월 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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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라노 시게모리
다이라노 시게모리
“바스라지기 직전의 비단, 광택 없는 배경, 기하학적으로 날카롭게 각이 진 사다리꼴의 커다란 검은 관복, 이것은 고요함의 위대한 양식이고, 엄격한 하나의 건축, 또는 절대 기하학이다. 초상화 자체가 ‘영웅’이라는 단어의 표의문자이며 그대로 하나의 상형문자이고, 사자를 저승으로 실어 나르는 배와도 같다.” 학교에서 한 번도 일본의 역사나 문화에 대해 배운 적이 없고 일본 문화가 개방되지 않아 일본 문화 자체의 언급이 금기시되던 시절, ‘흑요석(黑曜石)의 머리’(한국어 번역판 ‘앙드레 말로, 피카소를 말하다’)에서 12세기 후지와라노 다카노부(藤原隆信)의 ‘다이라노 시게모리(平重盛)’ 초상화를 극찬하는 앙드레 말로의 글을 읽고 깊은 충격을 받았다.

롤랑 바르트의 ‘기호(記號)의 제국’을 읽고는 더욱 놀랐다. 일본 전통 인형극 분라쿠(文樂)를 보기 위해 기어이 일본에 가서 직접 관람하기도 했다. 18세기 두 연인의 정사(情死)를 다룬 ‘소네자키신주(曾根崎心中)’였다. 인형의 키는 1m 정도이고 손, 발, 입은 물론 눈꺼풀까지 움직인다.

흔히 인형극이라면 인형을 조종하는 사람이 숨어 있게 마련인데, 여기서는 인형을 조종하는 세 사람의 숙련된 인형사가 그대로 무대에 등장해 인형과 같이 걷고 뛰고 움직인다. 검은 옷에 검은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어 어찌 보면 인형의 그림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 중의 리더는 머리에 아무것도 쓰지 않고 맨얼굴로 인형을 조종한다. 아무런 분장도 하지 않은, 이 수석 인형사의 얼굴은 무심하고 무표정하다. 엄청난 무대 위에서 표정 없이 무심하게 인형을 놀릴 수 있다는 것이 아마도 굉장한 수련의 결과인 듯하다.

인형을 쫓아 무대 위를 부산하게 돌아다니는 그들은 교묘한 기술을 꾸며대지도, 관중을 선동하지도 않는다. 그저 동작은 조용하고 민첩하며 행동에는 힘과 섬세함의 조화가 있다. 무심하기는 객석 위에 돌출된 회전무대에서 스토리를 낭송하는 다유(太夫)와 샤미센(三味線) 연주자들도 마찬가지다. 부동의 자세로 앉아 떨리는 목소리, 가성(假聲), 똑똑 끊어지는 억양 등으로 눈물, 분노, 비탄, 애원, 놀라움, 비애 등을 과장되게 표현하고 있지만 그 과장은 표면적일 뿐이다. 그것은 과잉성이라는 규약을 철저히 따르는 양식화(樣式化)된 과잉성이기 때문이다. 연극을 한참 보다 보면 마치 인형들이 저 혼자 무대를 휘젓고 다니는 듯 느껴지고, 연인들이 자살할 때는 얼핏 눈물이 핑 돌기도 하지만 막상 인형사나 샤미센 연주자들은 하얗게 씻겨 나간 양파처럼 일체의 감정이 배제되어 있다.

서양 연극과 달리 분라쿠는 연극의 프로세스 일체를 드러내 보이며 그 행위가 연극이라는 것을 전혀 감추지 않는다. 가히 브레히트의 소격(疏隔) 효과이다. 그러나 롤랑 바르트는 더 근원적인 문제로 올라간다. 만일 조종자가 숨어 있지 않다면 과연 당신은 그를 신격화할 수 있겠는가? 얼핏 푸코의 권력 문제까지도 연상시키는 구절이다.

가장 최근의 놀라움은 들뢰즈가 ‘감각의 논리’에서 “일본인들은 알고 있다. 우리 인생은 고작 풀잎 하나 알 수 있는 시간이라는 것을”이라고 쓴 구절을 읽고서였다. 아마도 하이쿠(俳句)를 언급하는 듯한 이 구절에서 일본 미학의 정신성에 대한 들뢰즈의 존경심이 문득 묻어 나왔다.

우리가 일본 문화의 부정적인 한 면만을 계속 젊은 세대에게 교육시킨다면 일본과의 싸움은 백전백패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자 상명대 명예교수
#일본 미학#다이라노 시게모리#인형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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