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판 커버스토리]서태지 복귀와 케이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10월 25일 03시 00분


코멘트

눈물겨운 컴백홈



서태지가 20일 9집 앨범을 들고 돌아왔다. 오른쪽 사진은 1996년 은퇴 회견을 하는 모습.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동아일보DB
서태지가 20일 9집 앨범을 들고 돌아왔다. 오른쪽 사진은 1996년 은퇴 회견을 하는 모습. 김경제 기자 kjk5873@donga.com·동아일보DB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가 있었다. 1992년 ‘난 알아요’부터 1995년 ‘컴백홈’과 1996년 은퇴에 이르기까지 4년은 한국 대중음악 호황기였고 서태지와 아이들은 그 중심에 있었다. ‘서태지와 아이들’의 시대는 ‘서태지의 아이들’의 시대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여기저기서 회오리 춤을 추거나 헤드뱅잉을 하고, 등교를 거른 채 음반가게 앞에 줄을 서거나 콘서트장으로 향했다. ‘됐어, 됐어/이제 그런 가르침은 됐어’ 같은 문구를 그렇게 많은 학생이 함께 외친 적은 그 전에도, 후에도 없었다.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은 그들보다 김건모나 신승훈의 음반이 더 많이 팔렸던 것과 관계없이, 아이들뿐 아니라 TV 뉴스와 시사 프로그램의 주목과, 아버지 어머니들의 눈총과 이목을 끌었다.

가수 서태지(정현철·42)가 데뷔한 지 22년 됐다. 20년 만에 세상은 뒤집혔다. 인기가요를 한나절 내내 울려대던 거리의 스피커는 잠잠해졌고, 방과 후 음반가게에 줄을 서던 풍경도 옛것이 됐다. TV 가요 프로그램의 시청률은 한 자릿수로 내려앉은 지 오래고, 서태지가 ‘이제 이 작은 CD 한 장이면…’ 하고 광고했던 하이파이 오디오 대신 손에 잡히기는커녕 눈에 보이지도 않는 디지털 음원과 컴퓨터 스피커, 유튜브, 이어폰이 음악 세상의 실체가 됐다.

가요 판 자체가 바뀌었다. 몇 개의 디지털 음원 사이트에서 발표되는 실시간 스트리밍과 다운로드를 기반으로 한 차트가 가요의 인기 정도를 보여주는 지표다. 실질적인 주류 가요 판이 거기 있다. 그 판은 10, 20대가 쥐고 있고 그들은 아이돌과 힙합에 빠져있다. TV 오디션이나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한 가수의 노래, 아니면 이적 김동률의 듣기 편한 성인 취향 가요가 나올 때나 성인 청중의 위력이 가요 판에 발휘된다. 그 성인 중 다수는 한때 서태지 팬이었다.

2009년 ‘모아이’ 이후 5년 만에 가요계에 귀환한 서태지의 새 앨범 수록곡들은 발표한 지 일주일도 되지 않아 음원 차트 30∼40위권으로 내려앉았다. 발표 당일 언저리에는 아이돌 그룹 비스트나 악동뮤지션, 에픽하이에게도 순위가 차례로 밀렸다. 서태지의 시대는 끝난 걸까.

‘옛날 옛적에 서태지와 아이들이 살았어요. 그러던 어느 날….’   
▼ “달라진 시대… 지금 데뷔했다면 서태지는 홍대앞 인디” ▼

“서태지의 시대는 끝났다”… “갱스터랩이라고, 못들어봤지?”
인터넷 시대엔 더이상 안 통해… 디지털 음원 위주 시장도 급변
아이유 앞세우고 예능 출연에도… 신곡 차트 1주만에 30위 아래로


서태지의 9집은 20일 발표 후 일주일을 버티지 못하고 주요 음원 차트의 30위권 아래로 내려갔다. 그나마 아이유가 마이크를 잡았거나 먼저 공개해 화제가 된 ‘소격동’과 ‘크리스말로윈’이 반짝 인기를 얻어 체면치레를 했다. 새 앨범 전체는 이슈의 바람을 거의 타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태지 신드롬이 작동하지 않은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돌아온 서태지, 다시 대세가 될 수는 없는

솔로 가수로 처음 냈던 5집(1998년)은 미국에서 작업해 음반 발매와 뮤직비디오 공개 같은 기본적인 홍보만 했다. 6집(2000년)은 서태지의 컴백에 대한 국민적 관심이 모아진, 사실상 마지막 음반이다. 은퇴를 번복한 서태지가 4년 만에 빨갛게 물들인 레게머리로 실체를 드러냈을 때, 수많은 어린 팬들이 컴백 공연장에서 리듬에 맞춰 헤드뱅잉과 슬램을 하는 장면이 TV 뉴스 프로그램을 탔다.

7집(2004년)과 8집(2009년)은 컴백 쇼가 라디오나 TV의 한 채널에 독점 전파를 탔던 것 정도를 제외하면 큰 술렁임을 끌어내지 못했다. 서태지 역시 이번에 본인의 입으로 “서태지의 시대는 1990년대에 끝났다”고 정리해줬다.

이번 9집 활동의 일련을 ‘서태지의 눈물겨운 노력’으로 보는 시각은 그래서 유효하다. 최고 인기 여가수 아이유에게 첫 신곡을 부르게 하고, TV 예능 프로그램 ‘해피투게더’에 나가 유재석, 박명수와 토크를 주고받으며 뉴스 프로그램에서 손석희와 이야기를 나눈 그는 모 방송사 프로그램인 ‘비정상회담’ 출연진과 한 소셜 뮤직 사이트의 이벤트에 함께 나가기로 했다. 당분간 이런 홍보 활동이 계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그의 CD가 나오는 날, 등교와 출근도 미뤄두고 새벽부터 음반 가게 앞에 줄을 섰던 학생과 직장인, 100만 장의 음반, 서태지가 은퇴할 때 가지 말라며 막아섰던, 그가 돌아올 때 노란 손수건을 흔들며 반겼던 김포공항의 인파는 다 어디로 간 걸까. 이 모든 게 현실이 아니라 서태지가 9집에서 말하는 동화 속의 이야기였던 걸까. 서태지는 왜 더이상 화제의 중심에 서지 못할까.

기형화된 음반 시장, 서태지형 영웅의 시대는 갔다

서태지는 가요계에서 독보적인 경력을 만들었다. 서태지형 영웅은 아직 서태지뿐이다. 스무 살에 데뷔했다. 사랑 노래뿐 아니라 획일화된 교육, 통일에 대한 무관심 같은 사회적 메시지를 장착한 곡으로 폭발적 인기를 모았다. 이것은 시위 현장이 아닌 TV와 라디오에서의 인기를 말한다. 음악, 춤, 패션 같은 여러 분야에서 최소한 한국에는 거의 없던 전혀 새로운 유행을 주류 사회에 불어넣었다. 최전성기에 은퇴를 선언했다.

전문가들은 ‘서태지형 영웅’의 시대는 다시 올 수 없다고 입을 모은다. 김작가 대중음악평론가는 “서태지 신드롬은 1990년대였기에 가능했다”고 못 박았다. 그는 “인터넷 시대 이후 서태지의 특성 자체가 하나의 딜레마가 돼서 서태지 앞에 나타났다”고 했다.

첫째는, 더이상 새로운 장르나 신선한 음악이 음악계에 파급력을 주지 못하는 시대라는 것이다. 초고속인터넷의 보급으로 최신 해외 장르가 음악 마니아들의 가정에 매일 배달되고 업데이트되는 환경에서 ‘갱스터랩이라고, 못 들어봤지?’ ‘감성코어를 소개해줄게’는 우스운 얘기가 됐다.

더 중요한 둘째는, 음반시장의 체질적 격변이다. 2000년대에 접어들며 디지털 음원의 공유와 스트리밍, 다운로드가 음악의 주 소비 행태가 되면서 50년 가까이 이어온 세계 음반 시장의 활황은 일순간 무너졌다. 수익이 줄어드니 모험은 멀어졌다. 김작가 평론가는 “대중음악은 작품인 동시에 제품이었다. 근데 작품과 제품 사이의 무게 균형이 깨지면서 대형 음반사는 반드시 수익을 낼 수 있는 콘텐츠에 천착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만약 서태지가 2014년에 스무 살이 됐다면 그의 활동 무대는 지금 서울 홍대 앞 인디 음악계일 것이라고 그는 상상했다. 잘생기고 예쁜 가수에게 흥행성이 보장된 작곡가가 그것도 다국적, 여러 명으로 붙어서 하나의 음반을 만들고, 그것을 다시 온·오프라인의 여러 채널을 통해 막대한 비용을 들여 홍보해 어떻게든 띄우는 방식은 아이돌 중심의 국내 가요계뿐 아니라 영미권 팝 시장에서도 보편화된 풍경이다.

서태지 공식 따라 움직이는 케이팝

서태지와 아이들은 가요계에 몇 가지 새로운 공식과 유산을 남겼고, 그들 중 일부는 여전히 게임의 룰로 작동하고 있다. 국내 컬러 TV 방송 개시(1980년 12월) 이후 이어지던 ‘듣는 음악’과 ‘보는 음악’의 줄다리기를, 서태지와 아이들은 12년 만에 ‘보는 음악’ 쪽으로 완전히 끌어왔다. 김작가 평론가는 “서태지는 한국 대중음악과 서구 음악 간 시차를 없앴고 라디오와 TV로 양분돼 있던 한국 음악 판도를 TV로 완전히 몰아왔다”고 말했다.

‘보는 음악’의 중심에는 안무와 뮤직비디오가 있다. 현재 통용되는 아이돌 그룹 안무의 기본 틀은 서태지와 아이들에서 나왔다. 여성그룹 씨스타의 춤을 만들고 있는 김규상 안무가는 “몸을 크게 써서 보여주는 ‘포인트 안무’를 대중가요계에 보급한 장본인이 서태지와 아이들이었다”고 했다. “이전이나 비슷한 시기에 박남정의 ‘ㄱㄴ춤’, 나미와 붐붐의 ‘토끼춤’, 현진영과 와와의 ‘고고춤’이 있었지만 보기에 경쾌하고 신난다는 느낌 정도였다. 거의 모든 10대가 그 동작을 따라하기 위해 열병처럼 들끓었던 춤은 ‘난 알아요’의 회오리춤이 처음이었다. 한때 라이벌 구도를 형성한 듀스의 춤도 의미 있었지만 단박에 눈에 박히고 누구나 한 번쯤 따라 춰보고 싶은 ‘포인트’의 매력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단연 앞섰다. 각각의 동작과 표정부터 그것들을 이으며 음악의 분위기에 몰입하도록 하는 구성력, 연출력은 지금도 최상위권으로 통용될 만한 수준이다.”

김규상 안무가는 신생 아이돌 그룹이나 연습생들에게 안무를 지도할 때 여전히 ‘난 알아요’와 ‘컴백홈’의 뮤직비디오를 보여준다. 싸이의 말춤을 만든 이주선 안무가는 “현재 활동하며 아이돌 춤을 만드는 국내 가요 안무가들 중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을 받지 않은 이는 단 한 명도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라고 했다.

서태지 8, 9집과 여러 아이돌 그룹의 뮤직비디오를 촬영한 쟈니브로스의 김준홍 감독은 “‘난 알아요’는 국내 뮤직비디오의 사실상 효시”라면서 “가수를 돋보이게 하고 공간감을 확장하는 흰색 배경, 곡 분위기를 장면처럼 표현한 세트, 안무를 돋보이게 하는 빠른 카메라 워크, 가수의 얼굴을 예쁘게 표현하는 촬영 각도와 편집을 비롯한 아이돌 영상 공식의 다수가 이때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 “여전한 파워… 요즘 아이돌 ‘난 알아요’ 뮤비 보며 연습” ▼

“서태지 공식은 유효하다”… 자극적인 랩에 낙차 큰 멜로디
따라하게 만드는 포인트 안무… H.O.T.도 엑소도 성공코드 답습
작곡능력 갖춘 아이돌도 늘어


‘랩+노래’, 길게 풀면 ‘자극적인 랩+낙차 큰 멜로디로 중독성 있는 후렴구 노래’라는 히트 가요의 공식도 ‘난 알아요’ 이후 확산돼 지금에 이른다. 이런 방식을 국내에서 선보인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에 앞서서도 홍서범, 신해철을 비롯해 몇몇 있지만 이후 댄스 그룹의 범람기를 통해 판의 룰로 자리 잡게 된 것은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다. 아이돌 그룹 멤버 중에서도 빅뱅의 지드래곤, 블락비의 지코처럼 작곡이나 프로듀싱 능력이 있는 이들이 팬들을 더 끄는 현상 역시 서태지와 아이들 이후 자리 잡은 아이돌 신화다.

서태지 은퇴 약 7개월 후인 1996년 8월 데뷔한 H.O.T.는 사회를 비판하는 가사, 강렬한 랩, 파격적인 패션과 헤어스타일 등 서태지와 아이들의 여러 가지 성공 코드를 답습한 그룹이다. 이후 젝스키스, 신화 등 다른 아이돌 그룹도 비슷한 노선을 밟았다.

이들 아이돌 그룹은 초기 쇼 오락 프로그램에 자주 출연하며 얼굴을 알리고 인기를 얻은 뒤에도 서태지의 경로를 그대로 따랐다. 데뷔 3, 4년 차가 되면 자작곡을 앨범에 수록하며 음악적 역량을 보여주는 시도를 한 것이다. H.O.T.의 멤버였던 강타는 한 토크쇼 프로그램에 출연해 “1, 2집을 내고 나니 듀스나 서태지 선배님 같은 음악적인 실력 없이 그런 큰 인기를 누리는 것이 옳지 않다는 말이 많았다. 당시 멤버들 대부분 경험이 없었지만 자작곡을 해야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

한편에선 다른 평가도 있다. 서태지가 그저 해프닝처럼 나타나 자기 방식대로 음악을 한 뒤 과대한 후대 평가를 받고 있는 팝스타로 보는 이도 적지 않다. 이들은 서태지가 자신의 노하우를 공유하거나 동료 음악가나 음악계와 공동 발전을 모색하기보다는 짧은 시간에 만든 자신만의 음악을 구현하기 위해 매니지먼트 시스템과 국내외 최상급 스태프를 일시적으로 ‘헤쳐모여’ 했다고 주장한다. 현재의 케이팝 아이돌 시스템은 서태지와 아이들의 영향보다는 앞서 발전한 일본의 아이돌 산업을 벤치마킹했고, 음악의 질적 향상은 서구권 음악의 직접 도입과 국내 언더그라운드 음악의 튼튼한 기반을 바탕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한 음반업계 중견 관계자는 “서태지가 당시 국내의 다른 음악가들의 수준과 비교해 볼 때 입지전적 혁신을 이뤄냈다고는 볼 수 없다. 그가 업계의 표준을 월등하게 넘어서는 작업물을 내거나 그로 인해 큰 유산을 남겼다는 것은 그 시대와 여론이 만들어낸 신화”라고 평가했다.

낯선 ‘케이팝 월드’에 재입장한 서태지

자, 서태지는 이제 자신이 뿌린 씨앗이 20년 동안 자라고 엉켜 넝쿨을 이룬 복잡한 미로의 세상, ‘이상한 케이팝 월드’에 떨어졌다. ‘잠적과 깜짝 귀환’이라는 새 앨범 발매의 순환 공식은 깨졌다. 요즘은 최정상권을 포함한 대부분의 아이돌 그룹이 TV 예능 프로그램은 물론이고 자신들의 일상을 낱낱이 공개하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에 뛰어들고, 1년에도 몇 번씩 디지털 싱글과 미니앨범을 발매해 가요계를 노크한다.

서태지와 아이들식 활동 경향이 조금씩 바뀌기 시작한 것은 밀레니엄을 앞둔 1999년 god가 데뷔하면서부터다. 아이돌 그룹 최초로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찍으며 일상생활을 공개했다. 카리스마보다는 친근함과 허술함을 강조했다. 서태지와 아이들 출신의 양현석이 세운 기획사 YG엔터테인먼트는 2006년 빅뱅 데뷔를 앞두고 그룹 멤버가 훈련받고 선발되는 과정 전부를 공개하고 실제로 한 예비 멤버를 탈락시키는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제작했다. 서태지 시절 유효했던 ‘실력 있는 뮤지션’이라는 마케팅 방법은 유지하면서도 아이돌 그룹이 기획사의 산물이며 멤버들의 자발성은 보장되기 힘들다는 민낯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아이돌 그룹이 생명력을 연장하기 위한 전략도 바뀌었다. 음원이나 음반 수입이 가수의 주 수입원이 될 수 없는 상황에서 아이돌 그룹 멤버들은 이전처럼 뮤지션으로 변신을 꾀하는 대신 연기, 예능 등으로 활동 영역을 확장했다. 데뷔 초부터 망가지는 모습을 보여주고 휴식기 없이 싱글 앨범을 내며, 음악에 집중하기보다는 다양한 활동을 하는 모습의 요즘 아이돌 그룹은 완전히 ‘탈서태지화’한 모습을 보여준다. JYP엔터테인먼트의 정욱 대표는 “서태지가 만들어 놓은 공식은 상당히 오랜 기간 남아 있다가 요 몇 년 새 급격히 변화했다”고 말했다. “디지털 음원 시장이 출현하고 소비 행태가 바뀌면서 가수가 수면에서 사라지는 순간 인기가 없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요즘 가수들은 ‘오늘도 활동 중’이라는 문패를 걸어놔야 한다.” ‘무한도전’이나 ‘런닝맨’에 나온 가수의 음원이 오랜 기간 공들여 준비한 싱어송라이터의 음반을 밀어내고 차트를 잠식하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정 대표는 “서태지가 룰을 만든 아이돌 게임판에서 정작 (오랫동안 모습을 감춘) 서태지 자신은 많은 부분을 잃어버린 셈”이라고 했다.

서태지의 후손인 아이돌 월드의 시계는 뒷면이 다르다. 이동연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는 현행 케이팝 제작 시스템의 발전을 주목했다. 이 교수는 “지금은 대형 매니지먼트 시스템이 지배하기 때문에 가수 한 사람의 창작력으로 승부할 수 없는 시대”라면서 “자본과 힘을 갖고 스타를 양육하고 만들어내는 상황에서 더이상 서태지 같은 1인 창작자가 성공할 가능성은 없다”고 했다.

폭발적인 천재는 늘 예고 없이 나온다


1인 영웅의 시대는 다시 오지 않을까. 먼저, ‘서태지형 영웅’으로 전문가들은 마이클 잭슨(1958∼2009), 커트 코베인(1967∼1994·‘너바나’ 리더), 짐 모리슨(1943∼1971·‘더 도어스’ 리더), 지미 헨드릭스(1942∼1970)를 주로 꼽았다. 스스로 만든 음악으로 대중음악계의 물줄기를 움직였고, 음악뿐 아니라 패션과 태도에서도 청년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기성세대의 견제 속에 시대적 아이콘의 위치에 오른 인물들.

이런 영웅은 사회적 격변기나 혼란의 시기에 곧잘 등장했다. 코베인은 로널드 레이건(1911∼2004)부터 조지 W 부시까지 12년간의 공화당 통치가 끝나고 클린턴 시대가 열리는 과도기에 등장했다. 헤비메탈과 성인 취향의 록, 댄스 음악이 혼재돼 있던 팝 시장에 극도로 염세적인 가사와 인디 음악 성향의 노이즈가 가득한 얼터너티브 록, 그런지 열풍을 불러왔다. 지미 헨드릭스와 짐 모리슨이 우상으로 떠오른 1960년대 후반은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 이슈와 반전 히피 운동이 사회를 휩쓸던 시기였다.

서태지와 아이들 신드롬은 군사 독재의 보수적인 사회 분위기가 문민정부 출범(1993년 2월)으로 격변하던 과도기에 터져 나왔다.

분명한 것은 자국에서 서태지와 비슷한 충격을 던진 영웅 중에 은퇴하거나 사망했다가 서태지처럼 5∼10년 뒤에 다시 돌아온 이들은 없다는 것이다. 조금 과장하자면 그들의 혁명은 죽음으로 완성됨으로써 영원한 젊음을 얻었다.

전문가들은 “음반 시장 몰락과 디지털 사회로의 급격한 이행으로 영웅의 시대는 갔지만, 천재성과 강한 카리스마를 지닌 팝스타가 사회 격변기와 맞물려 등장하면 또 한 번 서태지형 신드롬이 가능할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내다봤다. 이동연 교수는 “서태지가 1980년대나 2000년대에 태어났다면 그런 반향을 낳기 힘들었을 것”이라면서 “1990년대는 이념의 시대가 끝나고 자본화가 진행되면서 소비문화의 주류에 영합하지 않으면서도 새로운 사운드가 필요했던 상황이었다. 그걸 뒷받침할 음악 테크놀로지도 있었다”고 했다.

배순탁 대중음악평론가는 “한 뮤지션이 한 세대를 대표하는 현상은 예전에 끝났다”고 했다. 그는 “미국에서도 코베인 이후로 그런 존재는 없다”면서 “10, 20대 문화는 더이상 음악에 몰입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즐길 거리로 분화됐다. ‘난 한물 간 가수’라 말하는 서태지를 보며 더이상 ‘환상 속의 그대’는 없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넥스트 서태지’는 우리 안에 있는지도 모른다. 내 증손이거나, 내 손이거나, 내 자녀이거나, 어쩌면 나일지도 모른다. 매트릭스는 혁명의 시기에 네오를 찾아 나선다. 네오는 선천적 구세주일 수도 있고, 1000만 명이 지닌 시대적 욕망을 대표하는 대리인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어쨌든 네오는 매트릭스의 일부다.

임희윤 imi@donga.com·이새샘 기자
#토요판 커버스토리#서태지#케이팝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