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이슈]‘강서구 재력가 살인사건’ 용의자 추적 113일의 기록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9월 20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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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생했지, 아픈 데 없나” 형사의 말에 살인범 눈물 쏟다

서울 강서경찰서 7개 강력팀 팀장들이 장성원 형사과장실에서 폐쇄회로(CC)TV 영상에 찍힌 피의자 팽모 씨의 모습을 보며 
수사회의를 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서울 강서경찰서 7개 강력팀 팀장들이 장성원 형사과장실에서 폐쇄회로(CC)TV 영상에 찍힌 피의자 팽모 씨의 모습을 보며 수사회의를 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3월 3일 발생했던 ‘서울 강서구 재력가 살인사건’. 이 사건은 살인을 교사한 배후에 현직 서울시의원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서울 강서경찰서는 7개 강력팀을 모두 동원해 3개월 사이에 중국으로 도주한 범인을 검거하고 사건의 전모를 파헤쳤다. 이 사건을 전담 수사했던 강력2팀 윤경희 팀장(48)의 시선으로 숨은 뒷이야기를 풀어봤다.

내 눈 앞에 나타난 그놈

그놈이었다. 그토록 잡고 싶었던 놈이다. 양손에 수갑을, 두 발에는 족쇄를 차고 있었다. 절뚝거렸다. 6월 24일 오전 10시경 중국 선양(瀋陽) 공항. 그놈은 잔뜩 긴장한 채 수척해진 얼굴로 나타났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처음 묻는 말이 중요했다. 살인을 저지른 놈이 언제 마음을 바꿀지 모르는 일이었다. 자포자기하는 마음에 자해를 할 수도 있었다. 중국으로 오면서 냉정하게 “너 왜 그랬어?” “누가 시켰어?” “왜 데리러 왔는지 알지?”라는 말을 먼저 하려 했다.

놀랍게도 “고생했다”라는 말이 나왔다. “아픈 데는 없냐”고 물었다. 악명 높은 중국 공안 수감시설에서 친구와의 그릇된 의리를 지키기 위해 몇 차례 자살을 시도했던 놈이었다. 안쓰러웠다. 놈은 그 자리에서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113일 만이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강서구 재력가 살인사건’의 살인용의자 팽모 씨(44)를 중국에서 체포해 한국으로 데려오는 날 하늘은 무척이나 선명했다.

3월 2일, 살인? 살인!

7월 3일 살해용의자 팽 씨가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강서경찰서에서 나와 
서울남부지검으로 호송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7월 3일 살해용의자 팽 씨가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강서경찰서에서 나와 서울남부지검으로 호송되고 있다.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3월 2일 일요일. 서울 강서경찰서 강력2팀이 24시간 근무를 하는 당직날이었다. 일요일 당직사건은 주로 절도사건. 조용히 지나가고 있었다.

살인, 강도, 강간 같은 강력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다. 정보기술(IT) 기기를 손목에 차고 다니는 시대지만 사건이 발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 많은 경찰은 여전히 미신을 믿는다. 당직 서는 전날엔 개고기를 먹거나 부부관계도 하지 않고 당일엔 사무실에서 손톱을 자르거나 ‘조용하다’는 말도 하지 않는다. 그렇게 조심했는데도 결국 사건은 터졌다.

3월 3일 월요일 오전 3시경. ‘사람이 죽은 것 같다’는 신고가 들어왔다. ‘살인사건이 아니라 단순 변사이기를…’ 기도가 절로 나왔다. 현장에 도착하니 건물주인 송모 씨(67)가 사무실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머리에 둔기를 맞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바닥에 피가 흥건하게 고인 전형적인 살인사건이었다. 오상택 강력계장, 장성원 형사과장, 이맹호 서장에게 즉각 보고가 올라갔고 강서경찰서 7개 강력팀을 모두 비상소집했다.

모두가 잠든 월요일 오전 4시 반. 강력팀 형사 35명이 피해자 사무실 바로 옆 노래방 대형 룸에 모였다. 노래방 폐쇄회로(CC)TV에 찍힌 살해 장면을 함께 봤다. 0시 40분경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를 한 용의자가 피해자와 몸싸움하는 장면이 찍혔다. 살해 후 피해자의 검정 손가방을 뒤지는 장면도 있었다. 가방에는 현금 100여만 원이 있었지만 돈은 그대로 있었다. 단순 강도살인이 아닌 원한관계 또는 채무관계에서 비롯된 살인이라고 판단했다.

살인사건은 시간싸움이다. 형사과장과 강력계장이 수사를 지휘했다. 현장팀과 CCTV팀이 꾸려졌다. “주무팀인 강력2팀장은 피해자 주변 인간관계, 여자관계, 가족 행적을 확인하고 강력1팀 류중국 팀장은 사무실에 있는 장부와 문서 등 현장에서 나오는 모든 것 확보하세요. 나머지 5개팀은 주변 CCTV 모두 확인하도록.”

수사는 쉽지 않았다. 피해자 송 씨는 3000억 원대 재산을 소유한 자산가로 재산 축적 과정에서 여러 차례 송사에 휘말린 이력도 있었다. 송 씨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 가능성이 있는 인물이 너무 많았다. 가족, 지인, 사업 파트너 등 송 씨와 관계있는 모든 사람이 수사 대상이었다.

CCTV팀 수사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놈의 도주로를 파악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현장을 중심으로 5개팀이 구역을 나눠 특이사항이 나오면 그곳을 중심으로 구역을 다시 나눴다. CCTV 수사 전문가였던 강력5팀 조수호 팀장은 “진짜 눈알 빠지게 봤다”고 회상했다.

사건 발생 50여 분 전 놈이 송 씨를 살해한 빌딩 맞은편에 있는 주차건물 주차장으로 들어가는 CCTV 영상을 확보했다. 주차건물 2층에서 담배를 피우며 25분간 빌딩에서 사람들이 빠져나가기를 기다렸다. 밤 12시가 넘자 빌딩으로 들어와 범행 현장인 사무실 앞 화장실에 숨는 모습도 보였다. 송 씨가 나타나 사무실로 들어가려는 순간 용의자는 피해자의 머리를 손도끼로 여러 차례 내려치고 목 부위에 전기충격기로 충격을 줘 쓰러뜨렸다. 놈은 10분 뒤 현장을 빠져나가 길 건너편에서 택시를 탔다.

택시를 쫓는 수사가 시작됐다. 압수수색 영장을 발부받아 서울지역 택시 콜센터 7개 회사에 위성위치확인시스템(GPS) 자료를 요청했다. 콜택시에는 GPS 장치가 부착돼 있어 특정 시간에 특정 지역을 통과한 GPS 자료를 받으면 용의자의 도주 경로를 확인할 수 있었다.

문제는 서울 시내 대부분의 CCTV 영상 화질이 선명하지 않다는 것. 택시의 특징을 파악해 ‘번호 매기기’를 잘해야 했다. 놈이 탄 택시는 카드택시 표시가 없는 주황색 현대 쏘나타 NF 차량. 쏘나타 NF는 쏘나타 EF, 기아 K5 차량에 비해 옆모습이 둥글둥글하다. 대부분의 택시가 장거리 운행으로 휠을 자주 바꾸는데 이 택시는 처음 출시된 그대로의 휠을 장착하고 있었다. 차 옆문에 그려진 해치 마크의 위치도 살폈다.

가장 어려운 것은 비슷한 모양의 택시가 용의 택시와 엉켰을 때다. 그래서 ‘번호 매기기’가 중요하다. 특정 택시를 기준으로 앞차, 뒤차, 옆차 등에 하나하나 번호를 매겼다. 새로 도로에 합류하는 차가 있으면 중간 중간 끊고 다시 번호를 매기는 작업을 반복했다. 한 번 봐서는 안 되고 수십 번을 봐야 했다. 돋보기도 사용했다. 매일 흑백 CCTV 영상만 들여다보기를 닷새째 되던 3월 8일. 드디어 놈이 서울 영등포구 신세계백화점 앞에서 내리는 장면을 잡았다.

쉬운 일이 없었다. 놈이 내린 곳이 기둥에 가려 이후 어디로 이동했는지 알 수 없었다. 7개팀이 다 소집돼 주변 CCTV 영상을 모두 확보했다. 하루를 넘기고 그 다음 날, 백화점 건너편 한 카페 3층 CCTV 영상에 놈이 잡혔다. 놈은 주변을 잠시 서성거리다가 다시 택시 쪽으로 다가갔다. 불빛이 반짝이는 게 찍혔다. 택시를 갈아탄 것이었다. 문을 열 때 차문이 빛에 반사돼 반짝이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놈은 수사망을 따돌리기 위해 범행 현장에서 서울 영등포구 신세계백화점으로, 다시 백화점에서 경기 부천시 송내역으로, 송내역에서 인천 연수구 청학동의 한 아파트로, 아파트에서 인천 연수구 옥련동의 한 성당으로 네 차례 택시를 갈아타며 도주했다.

놈의 도주로를 따라가다 보니 새로운 용의자들도 생겼다. 놈이 두 번째로 갈아탄 아파트 인근에 피해자 송 씨가 소유하고 있는 웨딩홀에 근무하는 여직원이 살고 있었던 것. 청부 살해 의심점을 살폈지만 찾을 수 없었다. 놈의 종착지였던 성당 인근 한 고깃집 사장 아들도 의심스러웠다. 사건 발생 다음 날 이 아들이 인근 CCTV를 만지며 영상을 지운 흔적이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고깃집 사장이 “도끼가 없어졌다”고 말해 유력한 용의자로 떠올랐다. 하지만 사장이 도끼를 찾았다고 알렸고,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서 CCTV 영상을 인위적으로 지운 흔적이 없다고 판단하면서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성당 주변 반경 5km 내에 있는 모든 CCTV를 보며 다시 놈을 쫓았다. 이틀이 지났다. 검은 점이 찜질방 쪽으로 이동하는 게 보였다. 엉덩이가 ‘툭’ 튀어나온 채 안짱다리 걸음을 걷는 특징이 용의자였다. 찜질방이 놈의 최종 목적지라는 확신이 들었다. 찜질방 직원들에게 놈의 CCTV 모습을 보여줬다. “○○이네요. 짝퉁 가방을 파는 사람이에요”라고 말했다. 직원은 놈의 휴대전화 번호도 갖고 있었다.

“형식이가 수도 없이 압박했어요”

그렇게 놈의 신원을 확인하는 데 16일이 걸렸다. CCTV 2000여 대, 택시 10만여 대의 GPS 자료를 분석했다. 하지만 놈은 3월 6일 중국 칭다오(靑島)로 도주한 상태였다. 곧바로 인터폴에 적색수배를 요청했다.

용의자가 특정되자 수사가 활기를 띠었다. 통신자료, 금융계좌 등에 대한 압수수색이 진행됐다. 놈이 범행 전후 아내, 지인들과 나눈 카카오톡 문자메시지를 통해 김형식 서울시 의원(44)의 부탁으로 놈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을 밝혀냈다. 김 의원은 놈과 10년 동안 같이 밥도 먹고 술도 마시던 절친한 친구였다. 중국에서 두 달간 은신하던 놈은 5월 22일 선양에서 체포됐다.

6월 24일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 놈은 순순히 죄를 인정하고 사주를 받은 사실도 털어놨다. “형식이가 수도 없이 압박했어요. 의리를 지키고 빚을 갚기 위해 형식이가 시키는 대로 송 씨를 살해했습니다.”

이제 사건은 법정으로

8월 12일 ‘서울 강서구 재력가 살인사건’의 피의자 팽모 씨가 구치소에서 강서경찰서 강력2팀 윤경희 팀장에게 쓴 편지.
8월 12일 ‘서울 강서구 재력가 살인사건’의 피의자 팽모 씨가 구치소에서 강서경찰서 강력2팀 윤경희 팀장에게 쓴 편지.
공범의 진술은 유력한 객관적 증거로 채택된다. 같은 날 김 의원을 체포했다. 열흘간의 수사에서 김 의원은 혐의를 모두 부인했지만 팽 씨의 진술은 한결같았다. 서울 강서경찰서는 7월 3일 김 의원에게는 살인교사죄, 팽 씨에게는 살인죄를 적용해 서울남부지검으로 사건을 넘겼다.

사건이 검찰로 넘어가고 재판 준비가 한창이던 지난달 14일 구치소에 수감된 놈에게서 편지가 왔다.

‘매일 30분씩 제가 죽인 고인을 위해 빌고 또 빕니다. 팀장님과의 첫 만남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 같은 인간쓰레기 살인자한테 말해준 ‘고생했지’라는 한마디에 도망 다니면서 불안하고 안 좋은 마음먹었던 것들이 녹아내리며 살 것 같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무심코 내뱉었던 첫 물음에 놈은 마음을 열기로 결심했던 것이었다.

서울남부지법은 김 의원에 대한 재판을 국민참여재판 형식으로 다음 달 20일부터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김 의원은 여전히 자신의 혐의를 부인하고 있다. 사건은 아직도 진행 중이다.

박성진 psjin@donga.com·강은지 기자
#재력가#살인#살인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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