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찬식 칼럼]종교지도자들이 길을 잃으면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8월 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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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득할 수 없는 이석기 선처 호소
내란 음모 사건을 ‘어리석은 갈등’으로 왜곡해 통진당에 이용 당하는 결과
종교의 정치화는 신자 이탈 부채질할 것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이석기 의원을 선처해 달라는 4대 종단 지도자들의 호소는 곧바로 머쓱해지고 말았다. 이 의원과 그가 소속된 통합진보당이 종교지도자들의 탄원서를 재판에 활용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지난달 28일 서울고등법원 법정에서 최후 진술에 나선 이 의원은 “저의 석방을 탄원해 주신 염수정 추기경님, 자승 스님을 비롯한 4대 종단의 지도자들께 정말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천주교와 조계종 측은 “죄인이라도 용서받을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취지에서 탄원서를 보냈다”며 뒤늦게 선을 그었지만 이 의원의 최후 진술에선 ‘선처 호소’가 어느새 ‘석방 탄원’으로 바뀌어 있었다. 통진당은 ‘4대 종단 종교지도자들의 탄원에 감사드립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이 글귀 옆에는 더 큰 글씨로 ‘이석기 의원을 석방하라’고 적혀 있었다.

이 의원을 비롯한 RO 조직원 7명에 대한 2심 판결은 11일 내려질 예정이다. 1심에서 징역 12년형을 선고받은 이 의원에게 2심은 마지막 기회다. 대법원에서 판결이 달라질 가능성은 매우 낮기 때문이다. 염수정 추기경 측은 지난달 10일 자필로 쓴 탄원서를 법원에 보냈다고 밝혔다. 다른 종교지도자들도 비슷한 시기에 탄원서를 제출했다. 판결을 앞두고 판사들이 최종적인 판단을 하고 있을 즈음에 종교지도자들이 탄원서를 보낸 것은 2심 판결에 영향을 미치려는 의도임이 분명하다.

한국을 대표하는 종교지도자들이 무슨 이유로 이석기 재판에 관여하고 나섰는지 궁금했다. 이 의원과 통진당에 대한 민심은 싸늘하다. 얼마 전 7·30 재·보선에서도 통진당은 유권자로부터 철저히 외면받았다. 선거 때마다 야권연대에 목말라 하는 새정치민주연합도 통진당과의 야권연대는 없다고 선언하지 않았던가. 더구나 이 의원이 받고 있는 혐의는 ‘내란 음모’라는 국가 안위와 관련된 문제다.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는 탄원이었다.

천주교 측의 설명은 이렇다. 이석기 사건의 구속자 가족 5명이 염 추기경에게 면담을 요청해 지난달 3일 만났다. 면담 마지막에 가족들은 자신들이 준비해 간 탄원서를 내놓고 서명을 요청했다. 염 추기경은 서명을 하지 않고 일주일 뒤 따로 편지를 써서 법원에 우편으로 보냈다. 또한 조계종에 따르면 자승 총무원장은 탄원서에 서명해 줄 것을 요청받고 서명에만 참여했다고 한다.

종교지도자들이 보기 좋게 이용을 당했다고 쳐도 실망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염 추기경은 탄원서에서 2심 판사들에게 ‘공정한 재판을 해 달라’고 당부했다. 이 말은 “1심은 공정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질 여지가 충분하다. 자승 스님이 서명한 탄원서에는 ‘우리 사회가 어리석은 갈등으로 국력을 소진하지 말아야 한다’고 나와 있다. 북한과 연계된 내란 음모 여부를 따지는 일이 어떻게 ‘어리석은 갈등’인지 공감할 수 없다.

탄원서에 고무된 구속자 측은 올해 5월 구속자 가족들이 로마를 방문해 프란치스코 교황을 일반 알현한 것을 내세워 교황이 자신들을 지지한 것처럼 선전하고 있다. 구속자 가족은 교황이 매주 수요일 신자들과 만나는 행사의 맨 앞줄에서 알현했을 뿐이다. 염 추기경 등은 누구나 예견할 수 있는 이런 결과를 과연 내다보지 못했을까 의문이다. 국민 다수가 이번 탄원서 제출을 어떻게 생각할지도 염두에 두었어야 했다. 종교지도자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깊은 통찰력과 지혜, 예지력을 지녔을 것이라는 기대감이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한국 종교계는 정치적 사안이 불거질 때마다 ‘현실 참여’라는 명분으로 각 정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광경을 연출해 왔다. 외부 요청에 따른 참여가 아니라 종교계 스스로 정치화하는 움직임도 나타난다. 일반 국민은 ‘박근혜 퇴진’이라는 말을 쉽게 꺼내지 않지만 일부 종교계 인사는 거리낌 없이 입에 올릴 정도다. 바깥 세계에서 이석기의 선처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별로 없으나 종교계 내부에서는 다를 수 있다. 따라서 이번 탄원서가 의미하는 것은 둘 중 하나다. 종교지도자들이 처음부터 현실에 어둡거나, 아니면 종단 내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거나.

종교계가 사회 분열을 부추기는 것에 눈살을 찌푸리는 국민이 많다. 이 마당에 종교계의 최고지도자들마저 길을 잃고 흔들린다면 종교가 사회에 오히려 짐이 되는 현상이 가속화하고, 신자들의 종교 이탈도 심화될 것이다. 더 큰 영적 성장에 목마른 현대인들이나, 종교계 어느 쪽에도 이로운 일이 아니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
#이석기#RO#북한#통진당#종교#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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