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초생활수급자로 살던 어린 시절… 농구공에 모든 것을 걸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7월 2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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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석 기자의 스포츠 인생극장]<22>프로농구 동부 김주성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일러스트레이션 서장원 기자 yankeey@donga.com
유니폼은 땀으로 흠뻑 젖었다. 살짝 건드려도 물기가 뚝뚝 떨어질 것 같았다. 벤치에 턱 주저앉은 그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난주 한국 남자농구 대표팀이 훈련하고 있는 경기 용인시 모비스 체육관에서 만난 프로농구 동부 김주성(35·205cm)이었다. 2시간 동안 많게는 15세 어린 후배와 코트를 쉴 새 없이 뛰어다닌 그는 “샤워할 기운도 없다”며 웃었다. 양말을 벗자 드러난 발톱은 고된 운동의 흔적을 말없이 보여주듯 피멍으로 검게 변해 있었다. 농구 코트에서 환갑에 비유되는 30대 중반. 하지만 여전히 그는 뭔가를 향해 자신의 한계에 도전하고 있었다.

○ 국가대표 16년… 9월 亞경기가 고별무대

김주성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태극마크를 달고 있다. 8월 월드컵 농구와 9월 인천 아시아경기는 그에게 대표팀 고별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시아경기 5회 연속 출전의 대기록도 세운다. 그는 “오래 한다고 다 좋은 건 아니다”라고 말문을 연 뒤 “그래도 4년에 한 번씩 열리는 대회에 연속해서 나섰다는 데 자부심을 느낀다. 최고라는 칭찬보다는 언제나 잠재력이 있다는 말이 좋다”고 했다.

김주성은 중앙대 1학년 때인 1998년 대표팀에 처음 뽑혔으니 16년 동안 묵묵히 한자리를 지킨 셈이다. 그가 주로 맡은 파워 포워드나 센터 포지션은 골밑에서 치열한 몸싸움을 해야 하고 수비나 리바운드 같은 궂은일을 묵묵히 수행해야 하기에 블루칼라 워커에 비유된다. 부상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어 평소 자기관리가 중요하다. 김주성의 가치가 더욱 돋보이는 이유다.

대학 졸업 후 2002년 부산 아시아경기에서 한국이 20년 만의 금메달을 따는 데 앞장선 김주성은 그해 프로에 뛰어들어 TG(현 동부)에서 신인으로 우승 반지를 끼었다. 김주성 시대를 알린 신호탄이었다. 그는 그동안 소속 팀을 정규시즌 우승 4회, 플레이오프 3회 우승으로 이끈 간판스타로 성장했다. 톱스타 반열에 올랐지만 선한 이미지와 고개를 숙이는 태도에 팬들은 매료됐다.

○ 고교 1학년때 뒤늦게 농구공 잡아

김주성은 불우한 환경을 극복한 모범생으로도 유명하다. 아버지는 소아마비로 한쪽 다리를 심하게 절고 있다. 어머니는 척추측만증으로 등이 휘어 목과 어깨가 맞닿아 있다. 김주성은 “두 분 모두 후천성이다. 아버지는 세 살 때 침을 잘못 맞아 마비 증세가 왔다. 어머니도 세 살 때 고열 후유증으로 등이 굽었다”고 했다. 그의 부모는 고향인 전북 장수군 산골 마을에서 결혼한 뒤 농사로는 먹고살기가 힘들어 80만 원을 들고 부산으로 간 뒤 두 살 터울의 아들과 딸을 낳았다고 한다. 부산 해운대 달동네에서 네 식구는 단칸방 생활을 했다.

“당시 우리 식구는 기초생활수급자였다. 집 근처 교회에서 매달 20만∼30만 원을 지원받기도 했다.” 김주성은 “어머니는 집에서 나무젓가락에 비닐을 끼우는 포장 일로 생계를 거들었다. 한 박스를 채우면 1만 원 받았다. 나도 어릴 적 틈나는 대로 도왔다”고 회상했다. 그의 아버지는 신발 깔창을 찍어내는 천막 공장에서 일하다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때 실직한 뒤 일용직을 전전했다고 한다. 김주성은 “새벽에 어디론가 나갔다 밤늦게 귀가해 옆에서 주무시던 아버지에게서는 늘 기름 냄새가 났다”고 했다.

고교 1학년 때 뒤늦게 농구를 시작한 김주성의 당시 체격은 키 180cm에 몸무게는 60kg에 불과했다. 중앙대 시절 은사인 정봉섭 전 감독이 삐쩍 마른 김주성의 몸을 불리기 위해 농구부 숙소가 있던 경기 안성시에서 유명하다는 우족을 몇 달 동안 매일 먹게 했다는 일화도 있다. “고기 구경을 별로 못했다. 자장면은 어린이날에만 먹었다.”

고단했던 학창시절을 털어놓는 김주성의 표정은 이젠 다 옛일이라는 듯 담담했다. 운동만이 살길이라 여겨 농구공에 모든 희망을 걸었던 김주성은 프로 통산 14시즌 동안 연봉으로만 67억1000만 원을 벌었다. 고생하신 부모님에게 아파트와 장애인 전용 차량부터 사드렸다. “부모님은 불편한 몸에도 매번 경기장에 응원을 오셨다. 남에게 피해 주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겸손하라는 말씀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하셨다. 내게는 언제나 버팀목이시다.”

○ 농구 인기 부활의 기폭제가 되고 싶다

소극적이고 조용하던 그가 요즘 달라졌다는 얘기를 자주 듣는다. 말수와 유머 감각이 늘었고 코트에서도 더 적극적인 플레이를 펼치고 있기 때문이다. 며칠 전 서울 강남의 한 카페에서 만났던 김주성은 대학 때부터 알고 지내던 기자가 커피 값을 계산하자 “예전에 하루 1만 원이던 대표팀 일당이 10만 원으로 올라 내가 한턱내려고 했는데”라며 농담까지 건넸다.

그는 한때 부상을 의식해 몸을 사리거나 동료들을 챙기는 능력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듣기도 했다. 학창시절 힘겨운 환경을 거쳤기에 남보다는 나를 먼저 챙기는 의식이 자연스럽게 형성됐던 것일까. 김주성은 “자기 보호 본능이 강했던 것 같다. 더이상 과거에만 머물 수는 없다. 유종의 미를 위해서라도 변신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있다”고 했다. 대표팀 유재학 감독은 “예전과 달리 김주성이 투지를 보이고 있다. 이런 태도가 후배들에게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며 반겼다.

현 대표팀에서 유일하게 아시아경기 금메달 경험이 있는 김주성은 “승리의 순간은 짜릿하다. 후배들도 그런 흥분을 맛볼 수 있도록 돕고 싶다. 국내 농구의 인기를 다시 끌어올리는 기폭제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여기에 지난 시즌 감독 교체의 내홍 속에 최하위에 처졌던 소속팀 동부를 다시 정상으로 올리겠다는 각오도 있다. “농구 시작이 늦었고 성장기 때 배불리 먹어본 적은 별로 없다. 그 덕분에 체중 부담이 적어 장수하는 것 같다. 며칠 전부터 난생처음 영양제를 먹고 있다. 고생하는 내 몸에 뒤늦게라도 뭔가 보답하고 있다. 하하.”

어느덧 농구인생의 종착역을 향해 내달리고 있는 김주성. 그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 갑자기 촛불의 이미지가 겹쳐졌다. 꺼지기 전에 가장 밝은 빛을 낸다는 촛불 말이다.

김종석 기자 kjs0123@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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