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뒤 한국을 빛낼 100인]천재인 줄 모르는 연습벌레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1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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④ 김대진 교수가 본 두 제자, 피아니스트 손열음 김선욱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손열음(28)과 김선욱(26)은 두 살 차이의 또래다. 두 사람은 각각 초등학교 5학년 때 한국예술종합학교 예비학교에 입학하면서 나와 처음 만났다. 어렸지만 그 연령대의 아이 같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그만큼 성숙하고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열음이는 겉으로 표현을 잘 하지 않는 내성적인 학생이었고, 선욱이는 바로바로 자신을 표현하는 적극적인 학생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열음, 선욱이와의 첫 레슨은 1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열음이는 쇼팽 에튀드(연습곡)를 치겠다고 했다. “몇 번을 치겠니”라고 물었더니 그냥 “쇼팽 에튀드요”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몇 번을 치겠다는 거야”라고 다시 묻자 열음이는 “다요”라고 작게 말했다. 그러곤 전곡(24곡)을 악보도 보지 않고 연주했다. ‘이 나이에 전곡을 친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나는 잠시 ‘고민’했다.

선욱이도 특별했다. 잠시 손을 풀고 있으라고 하고 화장실에 다녀왔더니 아이가 악보를 보며 연주하고 있었다. 그런데 곡 이름이 생각나지 않았다. “무슨 곡이냐”고 물었더니 선욱이가 “말러 심포니인데, 모르세요?”라고 되물었다. 난해하기로 유명한 말러의 교향곡을 내 눈앞에서 초등학생이 치고 있다니…. 정말 두 아이 다 예상한 것 이상이었다.

선욱이는 엉뚱하기도 했다. 예비학교에 들어온 뒤 지도교수를 정할 때 선욱이는 1, 2, 3지망 항목에 모두 내 이름을 적었다. 나는 내심 ‘정말 나한테 배우고 싶었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직접 물어보니 “선생님이 제일 잘생겨서요”라고 답해 웃음을 줬다.

한예종 예비학교(초중고교생을 합쳐 20여 명이 정원)에 들어오는 아이들은 영재 소리를 들을 만큼 우수하다. 열음이와 선욱이는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였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두 사람은 본인들이 영재라는 것을 모를 정도로 천진난만했다. 그냥 음악 좋아하는 아이, 피아노 좋아하는 아이 정도로 스스로를 생각했던 것 같다.

콩쿠르를 준비할 때도 꼭 1등을 하거나 입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없었다. 그냥 열심히 연습을 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좋은 거라고 생각했고, 아니면 최선을 다한 것에 스스로 만족해했다. 둘은 예비학교 재학 초창기 때 나간 콩쿠르에서 상을 못 받았을 때도 그리 신경 쓰지 않는 모습이었다.

사실 연주자에게는 재능과 기량 못지않게 인성이 중요하다. 사람 됨됨이가 은연중 음악에 배어나오기 때문이다. 열음이와 선욱이의 진짜 강점은 상대 연주자를 인정하고 배려하는 것이었다. 둘은 서로뿐만 아니라 또래의 해외 연주자들과도 잘 어울렸다. 훌륭한 재주가 있는 사람이 일정 정도 성과를 이루고 나면 독선과 아집이 생길 수 있는데 두 사람에게선 그런 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열음이가 이런 인성을 갖게 된 데에는 책읽기가 큰 도움이 되지 않았나 싶다. 좀 과장을 하자면 열음이는 연습보다 책을 읽는 데 시간을 더 많이 할애했다. 항상 책을 끼고 살았다. 선욱이는 사람들하고 만나서 소통하는 점에서 특별했다. 고등학생 때 대학생 형들하고 같이 앉아 진지하게 음악 토론을 하고, 와인도 한잔씩 했던 모습이 기억난다.

열음이는 2011년 차이콥스키 국제음악콩쿠르에서 2위에 오르면서, 선욱이는 2006년 리즈 국제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본격적인 연주자의 길로 나섰다. 둘은 몇 년 전 한예종을 졸업한 후 내 품을 떠났다. 나는 그 후에도 아이들에게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곤 했지만 지금은 해외에서 제자들이 보낸 메일에 가끔 의도적으로 답을 안 할 때가 있다. 내가 제자들을 놓아줘야 그들이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고, 자기만의 음악 세계를 완성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에서다. 하지만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연주가로 활동하고 있는 둘에게 이 글을 통해 몇 가지만 얘기하고 싶다.

얘들아, 대중이 선호하는 것을 연주하면 큰 호응을 받을 수 있단다. 하지만 대중의 요구에 너무 치우치게 되면 자기 본연의 음악적 근본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을 기억하렴. 일정 부분 대중과 호흡하면서도 너희가 자기 색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 또 연주가로서 앞으로 10년, 20년 아니 그 이상 오래 활동하려면 더 많은 곡들을 새로 배워야만 한다. 새 곡을 연주하는 것은 힘든 과정이지. 그러나 길게 봤을 때, 레퍼토리를 늘려 나가야만 연주자로서의 수명도 늘릴 수 있단다.

김대진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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