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 사대부엔 신의 - 민초엔 부귀의 상징”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4월 1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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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민들엔 ‘재물〓벌’ 아이콘으로
조선후기 기념주화에 벌 문양 새겨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8폭 화조도 중 벌이 등장하는 그림. 그림 왼쪽 윗부분에 벌이 그려져 있다.
국립민속박물관이 소장한 8폭 화조도 중 벌이 등장하는 그림. 그림 왼쪽 윗부분에 벌이 그려져 있다.
“맛으로는 달달하기가 벌꿀만 한 것이 없다. 떡과 약과 따위도 이게 아니면 (맛이) 아름답지 않다. 조상이 살아 계실 때 꿀을 즐겼다면, 돌아가신 뒤 제사에 마땅히 써야 한다.”(이익의 ‘성호사설’에서)

벌꿀은 예부터 달콤함의 대명사였다. 고구려 주몽 시대에 양봉이 전래됐다고 알려지는데, 고려와 조선은 꿀을 귀히 여겨 일반 백성이 꿀 넣은 유과를 만드는 걸 금지하기도 했다. 구한말 서양종 벌이 보급돼 생산량이 늘 때까지 꿀은 고급품 성격이 강했다.

그런데 달짝지근한 꿀과 별개로 이를 생산하는 벌은 우리 문화에서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실생활에선 사람도 쏘는 침을 품어 조심스럽고 두려운 곤충이나, 문화적으로는 벌이 지닌 생태적 특성에 빗대 다양한 이미지를 형성했다. 최근 국립민속박물관이 강원 지역 양봉문화를 조사한 보고서 ‘강원도 인제의 토종벌과 토봉꾼’은 이러한 벌이 지닌 민속학적 상징과 의미도 함께 소개했다.

민속 문화에서 곤충은 각기 고유한 함의를 지녔다. 나비는 이상적 기쁨이나 장수를 상징했다. 개미는 부지런함과 질서를 의미했다. 매미는 한자로 선(蟬)인데 신선 선(仙)과 발음이 같아 신성함이나 불멸을 대변하는 존재로 읽혔다.

이에 비해 벌(한자로는 봉·蜂)은 다소 복합적이다. 사대부는 꿀벌을 신의와 의리의 곤충으로 극찬했다. 특히 왕에게 모든 걸 바치는 신하의 충절을 지녔다고 여겼다. 조선 후기 실학자 홍대용(1731∼1783)은 시문집 ‘담헌서(湛軒書)’에서 “군신 간의 의리는 벌에게서 취해온 것이다. 성인은 만물을 스승으로 삼는다”고 적었다. 여왕벌 한 마리를 모시고 일사불란하게 명령에 따르는 습성이 반영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우리 예술문화에서 독특한 형태로 발현된다. 중국에서 전파된 모란(한문으론 牧丹) 그림은 다른 꽃과 달리 새나 곤충을 그리지 않는 게 전통이었다. 당 태종이 신라 선덕여왕에게 보냈다는 모란 그림도 저의야 어땠든 법도엔 맞았던 셈이다. 그런데 조선 후기부터 궁중회화나 민화의 모란에 벌을 그려 넣는 ‘상식의 파괴’가 벌어진다. 박혜령 학예연구사는 “중국식 규칙에 얽매이지 않고 왕(모란)에게 충성하는 신하(벌)를 자유로이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귀중품 따위를 넣던 두루주머니. 여기서 벌은 재물운을 가져다주는 존재다.국립민속박물관 제공
귀중품 따위를 넣던 두루주머니. 여기서 벌은 재물운을 가져다주는 존재다.국립민속박물관 제공
벌의 위계질서를 높이 샀던 양반 계층과 달리 민가에선 부지런함에 주목했다. 성실하게 일하며 꿀을 열심히 모으는 모습에서 벌을 재물 복과 부귀(富貴)를 가져다주는 아이콘으로 받아들였다. 조선 후기에 국가적 행사나 왕실 잔치를 맞아 제조하는 기념주화인 별전(別錢)을 보면 벌 문양을 새겨놓았다. 귀중품이나 돈을 넣어 허리에 차는 두루주머니에도 수복(壽福)과 함께 벌을 수놓은 경우가 많다. ‘재물=벌’이란 욕망을 솔직하게 표현한 것이다.

여성 장신구에선 벌을 통한 성적인 코드도 읽을 수 있다. 벌 모양으로 제작한 머리 장식이나 벌 문양 귀주머니는 이를 착용한 여성에게 찾아드는 남성을 가리킨다. 박 학예사는 “벌 자체는 남성성을 드러내지만 주로 쓰인 건 여성 패션용품의 소재였다는 점이 이채롭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꿀벌#재물운#신의#의리#벌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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