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 하나… 기둥 하나… 고려가 숨 쉰다

  • 동아일보
  • 입력 2014년 3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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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해선리에 있는 왕건왕릉. 1994년 고쳐 지으며 봉분 둘레에 12각의 호석과 석재 난간을 새로 둘렀다. 왕릉을 둘러싼 8개의 석상은 왕건 대신 목숨을 바친 신숭겸 등 고려의 개국공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북한 황해북도 개성특급시 해선리에 있는 왕건왕릉. 1994년 고쳐 지으며 봉분 둘레에 12각의 호석과 석재 난간을 새로 둘렀다. 왕릉을 둘러싼 8개의 석상은 왕건 대신 목숨을 바친 신숭겸 등 고려의 개국공신을 형상화한 것이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북한 개성은 고려 건국 이듬해인 919년부터 약 470년간 고려 왕조의 수도였다. 당시엔 ‘개경(開京)’ ‘송도(松都)’ ‘송경(松京)’으로 불렸다. 명실공히 불교문화의 중심이자 국내외 인재와 문물이 몰려드는 도시였다. 지난해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서 ‘개성역사유적지구’를 세계유산으로 등재한 것도 개성이 대변하는 고려의 문화와 전통을 높이 평가했기 때문이다.

문화재청 국립문화재연구소가 최근 펴낸 자료집 ‘개성의 문화유적’에는 이러한 역사적 향취가 오롯하게 담겨 있다. 세계유산에 선정된 12개 유적군인 △개성 성곽 △개성 남대문 △만월대 △개성 첨성대 △고려 성균관 △숭양서원 △선죽교 △표충비 △왕건릉 △7릉군 △명릉 △공민왕릉을 중심으로 북한 국보유적의 현재를 아울렀다. 특히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가 간행한 ‘조선고적도보(朝鮮古蹟圖譜)’에 실린 개성 유적의 사진을 함께 실어 문화유산의 과거와 현재를 비교할 수 있다.

1391년 고려 공양왕 때 축조해 조선 태조 때 완공된 개성 남대문(위)과 충신 정몽주의 혼이 서린 선죽교.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1391년 고려 공양왕 때 축조해 조선 태조 때 완공된 개성 남대문(위)과 충신 정몽주의 혼이 서린 선죽교.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고려의 수도답게 일단 궁궐터와 왕릉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만월대는 송악산 구릉지에 잡은 고려의 정궁(正宮) 터다.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소실된 뒤 지금은 터만 남았지만, 회경전을 중심으로 높은 축대를 세워 기반을 닦은 모습은 당시 황제국을 천명한 웅기가 배어 있다. 박성진 학예연구사는 “만월대는 2007년부터 남북 공동발굴조사가 진행됐으나 2011년 이후 남북관계 경색으로 인해 중단된 상태”라고 설명했다.

고려 광종 21년(970년) 창건한 관음사의 대웅전(위)과 천문 관측을 위해 세운 개성 첨성대.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고려 광종 21년(970년) 창건한 관음사의 대웅전(위)과 천문 관측을 위해 세운 개성 첨성대. 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태조 왕건(877∼943)과 신혜 왕후가 합장된 왕건왕릉(본명칭은 현릉·顯陵)은 943년 만수산 기슭에 조성됐다. 돌을 쌓아 방을 만든 석실분으로 내부에 매화와 청룡, 노송과 백호 벽화가 남아 있다. 공민왕(1330∼1374)의 현릉(玄陵)과 왕비 노국 공주(?∼1365)의 정릉으로 이뤄진 공민왕릉은 조선 왕릉의 모체로 평가받는 유적이나, 1905년 러일전쟁 때 일본에 도굴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개성 하면 떠오르는 인물 포은 정몽주(1337∼1392). 그가 훗날 조선 태종이 되는 이방원 일파에게 목숨을 잃은 선죽교도 빠뜨릴 수 없다. 선죽교는 본래 난간이 없었으나 18세기에 따로 설치했다. 박 연구사는 “개성 문화유적은 민족공동의 유산인 만큼 안정적인 교류협력 기반을 구축하는 것이 뭣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
#고려#궁궐터#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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