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아에 엄마 배고픔 대물림… 두뇌 장애 등 평생 후유증 고통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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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굶주리는 북녘/준비해야 하나 된다]<하> 배 속에서부터 영양실조

북한 평양의 한 탁아소에서 낮잠을 자려는 북한 아이들. 북한 0∼5세 영·유아의 28%는 영양결핍 문제를 겪고 있고 1만 명당 사망률은 33명으로 남한의 6배가 넘는다. 이 사진은 북한을 오가는 한 대북 소식통이 찍어서 본보에 제공했다. 동아일보DB
북한 평양의 한 탁아소에서 낮잠을 자려는 북한 아이들. 북한 0∼5세 영·유아의 28%는 영양결핍 문제를 겪고 있고 1만 명당 사망률은 33명으로 남한의 6배가 넘는다. 이 사진은 북한을 오가는 한 대북 소식통이 찍어서 본보에 제공했다. 동아일보DB
《 기차역 바닥에서 낳은 아기는 사람 같지 않았다. 너무 작고 쭈글쭈글했다. 옆에서 출산을 돕던 행인 할머니가 쓰레기통 근처에서 주워온 유리조각으로 탯줄을 잘랐다. 아기가 감염될까 순간 걱정됐다. 엄마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상상해서는 안 되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아가야, 차라리 이대로 죽어버리는 게 낫지 않겠니.’ 이순실 씨는 36세이던 2004년 11월 양강도 혜산시 혜산역 보일러실에서 그렇게 출산했다. 》

임신했을 때 그는 풍찬노숙(風餐露宿)하는 성인 꽃제비였다. 제대로 먹지 못해 생리가 불순하다 보니 임신할 줄도 몰랐다. 먹은 게 없어 젖도 나오지 않았다. 이 씨는 하혈하면서 아이를 안고 장마당에 나가 구걸을 했다. 측은하게 여긴 사람들이 갖다 준 국수 국물과 희멀건 강냉이죽을 아기에게 먹였다.

2008년 탈북해 한국에 들어온 이 씨는 30일 기자에게 이 처참한 경험을 회고하다가 목이 메어 계속 말이 끊겼다. 그는 탈북 과정에서 그렇게 힘들게 키워온 아이를 잃어버렸다.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진짜로, 반드시 남한에서 태어나 남한 여자들처럼 건강한 애를 낳고 싶어요.”

이 씨는 다시 울기 시작했다.

○ 엄마 배 속에서부터 굶고 허약한 북한 아이들

북한에서 영·유아들 못지않게 지원이 절실한 취약계층은 임산부다. 최근 유엔보고서에 따르면 영·유아를 둔 어머니의 31.2%가 빈혈 증세가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10여 년 전 북한에서 자녀를 출산한 이애란 북한전통음식문화연구원장은 “내 옆의 침대에 있던 한 산모는 못 먹어서 1.8kg짜리 애를 낳았는데 너무 작고 새카매서 쥐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는 “탈북여성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지금도 상황이 별로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임신 기간 중 영양 부실은 각종 합병증을 야기하고 조산아와 미숙아 출산 등의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아기의 성장을 지연시킬 뿐만 아니라 두뇌를 비롯한 여러 부분의 발달장애 및 인지장애를 낳게 된다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강재헌 인제대 서울백병원 가정의학과 교수는 “엄마가 제대로 못 먹어서 태아도 뱃속에서 영양이 부족하게 공급받았을 경우에 그 아이도 저체중으로 자라게 될 뿐 아니라 성인기가 됐을 때 심장질환이나 당뇨병 같은 대사질환, 성인병 발병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최근 발표한 ‘2013 인간개발지수(HDI)’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 기준 북한의 0∼1세 영아 사망률은 1000명당 26명, 0∼5세 영·유아 사망률은 33명에 달했다. 남한은 각각 4명과 5명에 불과하다. 북한의 영·유아 사망률이 남한의 6배가 넘는 셈이다. 출생아 10만 명당 산모 사망 통계인 모성사망률 역시 북한은 77명으로, 남한(16명)의 약 5배인 것으로 조사됐다. 북한은 1990년대에는 10만 명당 54명이었다. 모성사망률이 개선되지 못하고 오히려 40% 이상 증가했다.

이순실 씨와 함께 압록강 다리 밑에서 꽃제비 생활을 하던 한 여성의 아기는 태어난 지 20일 만에 죽었다. 기온이 확 내려간 초겨울의 어느 날 새벽에 일어나 보니 아기가 딱딱한 돌처럼 굳어 있었다. 머리를 땅에 찧으며 오열하는 엄마를 보고 압록강 다리를 지키던 북한 군인들이 툭 던진 한마디를 이 씨는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거 봐, 오늘 춥다고 했잖아. 오늘쯤 죽을 줄 알았어….”

○ 영아기의 영양결핍은 평생의 치명적 손상

출생 후 아이를 키우는 일은 더 막막하다. 생필품도 부족한 북한에서 분유를 구하는 것은 소수 특권층에만 허락되는 특혜다. 대부분의 산모는 산후조리는커녕 제대로 먹지 못하기 때문에 모유가 충분히 나오지 않는다고 탈북 여성들은 증언한다. 강냉이죽을 떠먹이다 아이가 설사병에 걸려 탈수증세 때문에 생사의 기로에 서게 되는 경우도 적지 않다.

전문가들은 어린이가 한창 성장해야 할 결정적인 시기에 필수 영양소를 공급받지 못하면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되고, 이는 성인이 된 이후에도 회복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유엔은 올해 북한식량 실태 보고서에서 “태아의 성장 부진과 생후 2년 동안의 만성 영양실조는 회복할 수 없는 손상을 일으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또 “어른이 된 후에도 키가 작고 교육 성취도도 낮게 되며 이는 소득 감소, 생산성 감소 등의 문제로 이어진다”고 밝혔다.

국제보건기구(WHO)를 비롯한 국제기구와 구호단체들은 북한 임산부들의 지원에 크게 신경을 쓰고 있다. 유엔인구기금(UNFPA)은 4월 유엔 산하 중앙긴급구호기금(CERF) 50만 달러를 들여 북한 보건시설 300여 곳에 산모용 의약품과 의료기기를 지원했다. 철분과 엽산 같은 필수 영양제도 국제기구를 통해서 공급되고 있다.

외교부 고위당국자는 “국제기구들이 지원을 끊는 순간 북한의 취약계층은 열악한 영양과 위생 문제에 더욱 심각하게 노출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며 “정부도 이런 현실을 파악하고 있는 만큼 북한 취약계층의 인도적 지원에 대한 많은 고민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정은·이샘물 기자 light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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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굶주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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