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 주인 된 김지하, 공짜 술로 문닫다

  • 동아일보
  • 입력 2013년 5월 8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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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문명 기자가 쓰는 ‘김지하와 그의 시대’]<22>법정에 선 오적

오적은 1970년 최고의 정치적 사건이었다. ‘오적’ 필화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석방되고 있는 부완혁 김승균 김지하 김용성(흰옷차림·왼쪽부터) 등 4명을 유진산 신민당 당수(오른쪽 양복 입고 안경 쓴 이)가 마중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오적은 1970년 최고의 정치적 사건이었다. ‘오적’ 필화 사건으로 구속되었다가 보석으로 석방되고 있는 부완혁 김승균 김지하 김용성(흰옷차림·왼쪽부터) 등 4명을 유진산 신민당 당수(오른쪽 양복 입고 안경 쓴 이)가 마중하고 있다. 동아일보DB
당시 사상계에 재정후원을 했던 민주당 김세영 재정위원장(함태탄광 대표)은 당보 ‘민주전선’도 관리하고 있었다. 그는 1970년 6월 1일자에 시 ‘오적’을 당보에 게재해 평소 발행부수의 2배인 20만 부를 찍어 배포해버렸다. 오적 가운데 군 장성 대목은 빼 사실상 ‘사적(四賊)’이 되었지만 시 ‘오적’이 정치적 사건으로 비화되는 순간이었다.

김승균 전 사상계 편집장의 회고다.

“5월호가 발행되고 20여 일이 지난 뒤에 갑자기 김지하가 붙들려 갔다. 어디로 갔는지 확인이 안 돼 애를 태웠다. 그러다 다시 20여 일이 지났는데 그로부터 전화가 왔다. 정보부에 붙들려 갔었는데 그의 신병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다 그가 폐결핵을 앓고 있다는 것을 알고 병원에 가두려고 잠시 집에 다녀오라고 풀어주었다는 것이다. 이 틈에 김지하가 도망쳤다는 거다.”

김지하는 함석헌 선생 집으로 피신했다가 신세를 오래 지기가 곤란해 여관방으로 옮긴 뒤 김 전 편집장에게 전화를 한 거였다. 김 전 편집장은 사상계 부완혁 사장에게 바로 보고를 했고 김 민주당 재정위원장의 도움을 받아 김지하를 서울대병원에 입원시켰다. 다시 김 전 편집장의 말이다.

“김지하를 입원시키고 사무실로 돌아가 장부 정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정보부가 들이닥쳤다. 어디론가 끌려가 매질을 당하는데 재킷 속에 넣어둔 환자 보호자증이 내내 신경 쓰였다. 발각되면 김지하 소재가 파악될까봐 화장실로 가서 그것을 침으로 삼키느라 고생한 기억이 난다.”

김지하는 다시 붙들려 간다. 부완혁, 김승균, 민주전선 주간 김용성도 함께였다. 사상계는 폐간됐다.

오적 재판은 100일간이나 이어지면서 전 국민적 관심을 끌었다. 법정은 늘 만원이었다. 신문에도 대서특필되면서 미국 유럽 일본에까지 알려졌다. 오적은 당시만 해도 무명 시인이었던 김지하를 당대 최고 스타로 만들었다. 문학평론가 임헌영 씨는 1999년 8월 12일자 서울신문에 게재한 글에서 이렇게 말한다.

“69년 갓 시인이 된 김지하를 알고 있었던 사람은 서울대 출신을 비롯한 극소수였다. 하지만 ‘오적’ 사건으로 그는 분단 이후 최대 저항시인으로 급부상했다. 막상 공판이 열리고 보니 … 탁월한 이론가에다 말솜씨까지 갖춰 변호인이 질문만 해주면 되었다. … 당대 민권 변호인이었던 태륜기 홍영기 한승헌을 비롯한 여러 변호사가 법정을 뜨겁게 달궜고, 방청석에는 함석헌 장준하 안병욱 등을 비롯한 문인, 민주인사, 운동권 출신들이 총집결했다. 대법정에서 열렸던 ‘오적’ 공판은 김지하의 익살과 달변으로 마치 만담장이라도 된 듯한 분위기 때문에 언제나 초만원이었다.”

한승헌 변호사도 한국일보 2009년 1월 29일자에서 당시 법정 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검찰이 오적에 대해 ‘남한 사회의 빈부격차를 부각시켜 계급의식을 고취한 용공작품’이라고 하자 김 시인은 ‘오적이 있으니까 오적을 썼을 뿐’이라는 명답을 앞세우고 이렇게 반론했다. ‘내 시를 자꾸 용공이라고 하는데, 부정부패 그 자체가 이적이 될지는 몰라도 그것을 비판하는 소리가 이적이 될 수는 없다.’”

투옥은 길지 않았다. 김지하를 비롯한 피고인 4명은 모두 보석으로 9월 8일 석방된다.

김지하가 교도소 문을 나서는 날, 교도소 앞은 그를 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적였다. 여러 사람들이 자기 차에 타라고 김지하를 끌었다. 그는 “장준하 선생의 차를 탔다”고 한다. 장준하가 누구인가. 사상계 발행인으로 이미 8년 전인 62년 막사이사이 언론문학부문을 수상했으며 박정희 대통령을 향해 극언을 서슴지 않아 지성과 용기를 가진 지식인으로 추앙받던 인물 아닌가. “눈을 떠보니 스타가 되어 있었다”는 말은 당시 김지하에게 해당된 말이었다.

당시를 회고하는 김지하의 말이다.

“그날 이후 ‘곁길로 가지 말자! 똑바로 가자! 들뜨지 말자!’를 명심하고 또 명심했다. 하지만 매스컴도 톱스타로 대접했고 가는 곳마다 ‘왕자’ 대접을 받았다(웃음). 심지어 택시 운전사나 찻집 주인들까지 나를 알아보았다. 장안의 내로라하는 사람들이 직간접으로 연락해 만나자 했고, 밥과 술을 원 없이 사주었다. 나는 그때 서울 바닥에 ‘상류’라고 부르기도 뭣하고 ‘노블레스 오블리주’라는 말로는 과분한, 어떤 장소, 어떤 집단이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 속에 나 같은 촌놈을 끼워주다니, 서울이 이제야 나를 허용하는 구나…. 솔직히 나는 당시만 해도 칭찬에 굶주리고 명예에 굶주렸던 청년이었다.”

김지하는 매일 사람들에 이끌려 세상 밖으로 나왔고 번번이 술에 취했다. 마침 출판사 한얼문고에서는 그의 첫 시집 ‘황토’가 간행됐다. 70년 겨울 출판기념회가 열린 신문회관(현 한국프레스센터)에는 명사들이 줄지어 일대 성황을 이루었다.

여기서 잠깐 재미있는 에피소드 하나를 전하자. 김지하가 당시 명성을 이용해 술집 얼굴마담을 하게 된 사연이다. 송철원 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의 회고다.

“무교동에서 식당을 하던 경기고 선배가 운영이 신통치 않자 영업상담을 해 왔다. 그래서 내가 김지하에게 ‘우리 주변에 술 먹을 사람은 무지 많은데 돈은 없으니 유명해진 네가 얼굴마담을 하면 여럿이 공짜로 술도 실컷 먹고 (운동) 자금도 마련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김지하도 쾌히 승낙했다. 우리는 선배의 식당을 술집으로 바꾸고 인테리어도 독특하게 꾸몄다. 구들장으로 식탁을 만들고 대나무 통으로 술통을 삼고 내부를 동굴 분위기로 만든 뒤 술집 이름을 ‘석기시대’라 붙였다. 잡지 ‘썬데이서울’에 김지하 얼굴까지 실은 광고도 냈다. 모친이 ‘외아들을 함부로 돌린다’고 우리에게 욕을 바가지로 했던 기억이 난다(웃음). 어떻든 ‘석기시대’는 대박을 쳤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다시 송철원의 말이다.

“장사가 잘되니까 주인이었던 선배의 태도가 달라졌다. 운동권 학생들에게는 돈을 안 받겠다고 해놓고 받질 않나, 이익금을 민주화 운동 자금으로 준다는 약속도 안 지켰다. 결국 문을 닫았다. 하지만 좀 미련이 남았다. 그래서 아예 술집 주인과 동업을 하기로 하고 김지하와 함께 ‘레지스탕스’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하지만 1년 만에 망했다”

이유는 ‘공짜 술’ 때문이었다고 한다.

“우리가 하도 시도 때도 없이 퍼 마셨다(웃음). 어느 날은 ‘금일 휴업’이라고 써 붙여놓고 김민기(극단 학전 대표) 김지하 나 셋이서 이틀인가 사흘인가를 내리 마셨다(웃음). 외상도 많았다. 운동권 친구들이 돈이 떨어지면 밀어닥쳤다. 술집 이름부터가 저항적 냄새가 나는 데다 김지하가 하는 술집이라는 소문이 나자 정보부원들까지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옆 테이블 사람들이 무슨 말 하나 귀를 쫑긋 세우고 밤새 죽치고 있으니 손님들이 올 리가 있겠나.”

살얼음판 같았지만 그래도 ‘낭만’이란 게 있었던 시절의 이야기들이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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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하#공짜 술#오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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