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강동구]‘작은 장례식’ 문화를 만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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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2년 12월 31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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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구 생사의례문화연구원장
강동구 생사의례문화연구원장
장례문화는 기층문화의 근간을 이루며 가장 늦게 바뀌기 때문에 세계 어디를 가든 그 나라 문화의 진수를 알려면 장례식을 보면 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 장례문화는 그렇지 못하다. 오히려 우리 문화를 왜곡해 보여준다. 우리의 현대 장례문화가 이상하다. 변화된 현실과 시대정신을 보여주는 바람직한 상징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도 아니다. 한마디로 무국적 짬뽕문화이다. 그래서 요상하고 기이하다.

시신 처리 등 기능성만 강조

이는 우리 장례문화가 국민적 무관심 속에 사회문화적 변화상을 즉흥적, 편의적으로 수용해 왔기 때문이다.

무릇 한 시대의 장례문화는 그 시대, 문화의 가장 기본이 되는 기층 가치를 유지 보전하며 확대 재생산해 사회문화적 변동성을 줄이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해야 한다. 우리 장례문화는 그렇지 못하다. 여전히 우리 사회는 가족주의, 공동체주의를 근간으로 이성적 합리성과 감성적 정서에 따라 움직인다. 그러나 우리 장례문화는 이러한 사회적 가치들을 반영하는 상징적 장치들이 빈약하다.

본래 우리 전통 장례문화는 다양하며 풍부한 문화적 상징으로 가득했다. 고인의 죽음을 못 미더워 하는 초혼(招魂)이 그렇고 고인의 넋을 위무하는 각종 깃발들과 음악이 그렇고 유가족의 슬픔을 위무하는 놀이들이 그랬다. 그런데 지금의 장례는 오로지 고인의 시신을 위생적으로 신속하고 편리하게 처리하는 데 집중되어 있다. 여기다 유족의 사회적 지위를 보여주는 조화(弔花)와 몇몇 편의성, 현대화된 장치들이 더해져 있을 뿐이다. 시신의 위생적, 효율적 처리라는 기능성만을 강조한, 문화적 풍족성이란 찾아볼 수 없는 저급한 기능의례로 전락했다.

장례문화란 한 인간의 개체적 삶을 종국적으로 의미 있게 정리하고 고인과 유족의 내세에 대한 바람, 그리고 그들의 슬픔을 위로하며, 한 개인의 죽음 앞에서 삶의 유한성을 긍정적으로 승화시켜 그래도 ‘삶은 의미 있음’을 선언하는 상징체계다. 역사적으로 어느 시대든, 그리고 현대 세계 어느 문화권이든 장례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문화적 의미체계 안에서 진행된다.

별다른 사회적 기능이나 문화적 풍족함이 없다면 고인이나 유가족, 조객들에 대한 서비스라도 뛰어나야 할 텐데 그렇지도 않다. 경제적, 정신적으로 죽음을 미리 준비하고 대비하는 데 도움을 줘야 할 상조회사는 오로지 국민이 미리 내는 돈(상조부금)에만 정신 팔려 있고, 장례식장은 유가족이 발인(發靷)하여 계산 끝내고 나가는 순간, 그것으로 끝이다. 이들에게 외국의 장묘회사들이 제공하고 있는 유가족 돌봄이나 슬픔 치유, 유가족 자조모임 후원 등은 금시초문일 뿐이다.

외국 장묘회사들은 자신들이 장례를 치른 고인과 유가족들을 위한 추모제를 연례적으로 하고, 묘원에 잠들어 있는 고인들과 성묘객들을 위해 수시로 추모음악회를 연다. 가물에 콩 나듯 우리 장묘회사들도 이런 문화행사를 하지만 이른바 잘나가는 상조회사, 장례식장일수록 이를 객기(客氣)로 치부한다. 장사꾼으로 쳐도 아주 싸구려 장사꾼들이 판치는 시장이다.

문화적 의미 찾아볼 수 없어

상황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장례비용은 지나치게 고비용 구조로 되어 있다. 외국의 경우 대략 1인당 국민총생산(GNP)의 20% 선 아래에서 장례비용이 결정된다. 미국은 1인당 GNP의 15∼20% 선인 약 8000달러, 서구 유럽은 1인당 GNP의 10∼15% 선인 5000달러 정도가 소요된다. 반면 우리는 1인당 GNP의 절반이 넘는 1200만 원 정도가 장례비로 지출된다. 접객비(接客費·조객들을 접대하는 비용)를 제외하더라도 1인당 GNP의 40%가 넘어 외국보다 매우 높은 수준이다.

이렇듯 현대 한국사회의 장례문화는 차원과 수준을 달리하는 많은 문제점이 산적해 있다. 장례문화 개선을 위한 사회적, 정책적 노력이 화급하다.

강동구 생사의례문화연구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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