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이헌진]상하이의 열정과 냉정

  • Array
  • 입력 2010년 5월 3일 03시 00분


코멘트
“이 도시를 그대로 둔다면 신은 소돔과 고모라에 사죄해야 할 것이다.”

100여 년 전 한 선교사는 중국 상하이(上海)를 두고 이런 저주를 퍼부었다. 온갖 악행과 마약, 매음으로 신의 심판을 받아 철저히 멸망당한 성서 속의 도시 소돔과 고모라가 상하이보다 오히려 낫다고 본 것이다. 미국의 중국계 작가 스텔라 동은 저서 ‘상하이: 타락한 도시의 흥망’에서 현대 중국 성립 이전의 옛 상하이를 적나라하게 파헤쳤다.

널리 알려졌다시피 세계열강은 1842년 난징(南京)조약으로 강제로 상하이의 문을 열고 이곳을 중국 침략의 발판으로 삼았다. 치외법권을 가진 조차지(租借地)가 곳곳에 들어서면서 상하이는 국제도시로 커졌지만 한 공원에 내걸린 ‘중국인과 개는 출입금지’라는 푯말처럼 이는 몰락하는 중국의 치욕이기도 했다.

당시 기록에는 상하이에서 동서양의 저급한 문화가 만개했던 것을 볼 수 있다. 현재 상하이 최대 번화가인 난징로와 황푸(黃浦) 강 서안의 와이탄(外灘) 곳곳이 아편굴이자 매음굴로 뒤덮여 있었다. 오죽하면 영어 단어 ‘shanghai’에 ‘마약을 써서 배에 끌어들여 선원을 만들다’, ‘유괴하다’, ‘속여서 싫은 일을 억지로 시키다’란 뜻이 생겼을까 싶다. 1949년 중국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상하이의 오랜 오욕은 마침내 끝을 맺는다.

40여 년 뒤 덩샤오핑(鄧小平)은 상하이에 내재한 국제성을 주목했다. 그는 1990년 상하이 황푸 강 동쪽 푸둥(浦東)지구 개발로 상하이의 긴 잠을 깨운다. 개혁개방 깃발을 든 지 꼭 11년 뒤의 일이다.

덩은 당시 먼저 개방해 초고속 성장가도를 달리던 선전(深(수,천)) 주하이(珠海) 샤먼(廈門) 등과 상하이를 이렇게 비교했다. “선전은 홍콩과 마주 본다. 주하이는 마카오를, 샤먼은 대만을 마주 본다. 상하이 푸둥은 태평양, 즉 세계를 마주 보고 있다.”

오늘날 세계의 눈앞에 펼쳐진 국제도시 상하이의 모습은 이 판단이 옳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20년이 채 걸리지 않아 상하이는 국제도시로 다시 세계무대에 복귀했다. 과거의 오명은 씻은 지 오래다. 세계의 대표적 금융기관들이 대부분 진출한 국제 금융허브이자 중국을 대표하는 국제도시로 자리매김했고 어느덧 ‘동방의 진주’라는 별명을 지닌 홍콩을 넘볼 정도로 성장했다. ‘매년 작은 변화가 있고 3년마다 큰 변화가 있다’는 상하이 주민들의 표현처럼 이 도시는 천지개벽을 한 것이다.

지난달 30일 ‘경제 과학 문화 올림픽’이라 불리는 엑스포가 이 도시에서 막을 올렸다. 2년 전 베이징(北京) 올림픽이 중국의 굴기(굴起·우뚝 일어섬)를 상징한다면 이번 엑스포는 이에 더해 상하이의 부활을 기념하는 축제다.

더구나 이 와중에도 새로운 미래는 착착 준비되고 있다. 엑스포 준비에 한창이던 지난해 중반 상하이 시는 한 조직을 출범시켰다. 개척정신과 패기가 언제부터인가 떨어졌다고 시 내부에서는 자성의 목소리가 높았고 이를 극복하고 20년 뒤 상하이의 미래를 준비하자는 게 목표이다. 중국 언론은 가장 화려할 때 냉철하게 현실을 직시한다는 뜻에서 ‘차가운 조직(冷班子)’이란 별명을 이 조직에 붙였다. “오늘의 상하이를 볼 때 1990년을 기억하듯이, 2030년 상하이를 볼 때 2010년을 떠올리도록 하겠다”고 상하이 공무원들은 다짐하고 있다. 상하이의 이런 모습에서 문득 두려움을 느낀다.

이헌진 베이징 특파원 mungchii@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