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퍼세이브도 옐로카드도…승리가 너무나 간절했던 권순태

  • 스포츠동아
  • 입력 2017년 3월 30일 05시 45분


코멘트
시리아전에서 얼굴로 상대의 강슛을 막아내는 등 선방쇼를 거듭한 국가대표 수문장 권순태는 29일 서울 신사동의 한 작은 카페에서 스포츠동아와 만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시리아전에서 얼굴로 상대의 강슛을 막아내는 등 선방쇼를 거듭한 국가대표 수문장 권순태는 29일 서울 신사동의 한 작은 카페에서 스포츠동아와 만나 포즈를 취하고 있다.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 GK 권순태가 말하는 태극마크의 무게

“시리아전 알 카티브 강슛 버티자는 생각뿐
경기 지연? 욕 먹더라도 꼭 이기고 싶었죠
귀하지 않은 A매치 없다…모든 걸 바칠 것”

1-0 살얼음판 리드를 지키던 축구국가대표팀은 후반 25분 가슴 철렁한 위기를 맞았다. 시리아의 빠른 역습과 침투패스 하나에 문전 왼쪽 측면이 완전히 뚫렸다. 상대 공격수 알 카티브의 왼발 강슛. 모두가 실점을 직감했지만, 골키퍼 권순태(33·가시마 앤틀러스)가 얼굴로 볼을 막아냈다.

28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끝난 한국-시리아의 2018러시아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A조 7차전은 내내 불안했다. 부상에서 갓 회복됐음에도 변치 않은 클래스를 보여준 주장 기성용(28·스완지시티)과 선방쇼를 거듭한 권순태 덕분에 다행스러운 1-0 승리를 챙길 수 있었다.

어쨌든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다. 다만 온몸을 던진 권순태가 아니었다면 이날의 승점 3점은 어려웠을지 모른다. 개인통산 5번째 A매치. 대표팀의 무실점 승리는 이번 최종예선에서 처음이라 의미를 더했다. 결전 다음날인 29일, 소속팀 합류를 위해 일본으로 출국하기 직전의 그를 서울 강남구의 한 작은 카페에서 만났다. 벌건 얼굴과 부어오른 두 눈에서 격전의 흔적을 엿볼 수 있었다.

● 나와 우리를 살린 간절함

시리아전이 끝난 뒤 대표팀 설기현(38) 코치와 차두리(37) 전력분석관이 권순태에게 다가왔다. 이들은 똑같은 말을 건넸다. “네가 간절해서 공이 그곳(이마)으로 향한 것 같다. 정말 잘했다.”

부정할 수 없었다. 알 카티브가 조금만 낮게 볼을 찼더라면 결과는 알 수 없었다. “손을 들 겨를이 없었다. 그냥 얼굴로 막고, 버티자는 생각이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명 수문장 김병지(47)는 이를 ‘투혼’으로 표현한 바 있다. 동물적인 반사신경도, 운이 좋았던 것이 아니라 전부 의도된 행동이라는 의미다.

국가대표 수문장의 희생은 또 있었다. 지난해까지 몸담은 K리그 클래식(1부리그) 전북현대에서 그는 경고누적으로 결장한 적이 한 번도 없다. 그만큼 깔끔한 플레이로 정평이 났다. 그러나 권순태는 시리아전에서 A매치 첫 경고를 받았다. 후반 추가시간에 볼을 늦게 처리한 장면을 주심은 의도적인 시간지연으로 봤다.

그 역시 부정하지 않았다. “침대축구만큼이나 볼을 끄는 걸 싫어한다. 사력을 다한 시리아 선수들에게 정말 미안했다. 3만 홈 관중에게도 창피했다. 그런데 경고와 승리는 바꿀 가치가 있었다. 옐로카드 1장이 우리를 승리의 길로 안내한다면 마다할 필요가 없었다.”

그만큼 권순태는 간절했다. 쟁쟁한 동료들을 대신해 대표팀 골문을 책임진 만큼 자신을 증명해야 했다. 벤치의 판단에 보답해야 했다. 물론 보답하는 유일한 길이 ‘경기력’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안다. “내 (시간지연) 행위는 논란거리다. 많은 비난이 쏟아질 수 있다는 것도 모르진 않다. 다만 기왕 욕을 먹어야 한다면 이기고 욕을 먹고 싶었다. 몸이 피곤하진 않다. (공에 맞은) 머리가 아프지도 않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정말 심했다.”

축구대표팀 권순태. 스포츠동아DB
축구대표팀 권순태. 스포츠동아DB

● 부끄럽지 않은 태극전사를 향해

2015년 9월 라오스와의 러시아월드컵 아시아 2차 예선 G조 홈경기가 권순태의 A매치 데뷔전이었다. 우리의 8-0 대승으로 끝난 이 경기는 30대 중반을 바라보는 나이에 태극마크를 단 그에게 썩 유쾌하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80분 내내 볼 터치 한 번 못하다 동료의 백패스를 놓치는(그것도 2번이나) 실수를 범한 탓이다. 당시의 아쉬움은 스스로를 되돌아본 계기가 됐다. 이후 대표팀 캠프에 모일 때마다 그는 끊임없이 자문자답한다. “‘내가 정말 태극마크를 달 실력은 될까?’ ‘내가 대표팀의 가치를 떨어뜨리진 않을까?’ 그저 최대한 ‘쓸모가 있는’ 선수가 되려고 노력한다.”

그런 면에서 0-1 패배로 끝난 23일 중국 원정은 몹시 뼈아프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서 숱한 중국 원정을 경험했어도 이번처럼 상대가 정중했던 적은 없었다. 홈 텃세도 없었고, 위해를 가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불편하지 않도록 더욱 신경을 쓰는 분위기였다. 그럼에도 우리는 패했다. 권순태는 “(전북에서 함께 뛴) 펑샤오팅과 잠깐 대화를 했다. ‘기술은 부족해도 정신이 깨어났다’고 하더라. 텃세를 부리지 않은 것도 자신감에서 비롯됐을 것”이라며 씁쓸하게 웃었다. 압도적인 상대전적에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얕잡아본 자신이 몹시 부끄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권순태는 한국축구의 저력을 믿는다. 태극전사들도 오늘의 위기를 내일의 승리로 바꾸리라 확신한다. “앞선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은 우리 선배들이 닦은 영광의 길이다. A매치를 귀히 여기지 않는 선수는 없다. 극도의 중압감을 느끼는 것도, 경직된 움직임을 보이는 것도 모두 더 잘하려다 비롯된 사태다. 우리는 반드시 월드컵으로 향한다. 거기에 내가 해야 할 몫이 조금이나마 있다면 몸과 마음을 전부 바치겠다. 아주 간절하게….”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지금 뜨는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