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스포츠] 이치로가 MLB에 남긴 유산들

  • 스포츠동아
  • 입력 2018년 4월 26일 13시 0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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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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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로와 루틴 시리즈(4편·끝)

스캔들 이후 찾아온 첫 시련과 2001시즌 빛나는 MVP와 신인왕 타이틀
베이브 루스 이후 잊혀졌던 1세기 전의 야구를 기억나게 해준 이치로
훈련태도·방법, 장비를 대하는 자세, 팬들을 향한 행동 등에서 모범 보여
야구를 향한 외로운 구도자인가, 오직 자신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인가

이치로를 무너뜨린 것은 뜻밖에도 스무 살짜리 ‘롱다리’ 교환학생이었다.

이치로는 샌프란시스코의 호스티스 클럽에서 문제의 학생을 만났다. 오클랜드 원정경기를 마친 뒤 자신이 묵는 호텔의 방 번호를 아무도 몰래 알려줬다. 그날 밤 교환학생이 이치로의 방으로 찾아왔다. 그의 핸드백에는 핸드폰이 켜진 채였다. 녹음을 하고 있었다. 물론 이치로는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두 사람이 방에서 나눈 은밀한 대화는 물론 그날 밤에 벌어진 적나라한 행동은 모두 녹음됐다.

이치로의 은밀한 사생활은 폭로전문지 ‘주간 프라이데이’에 공개됐다.

●이치로에게 찾아온 첫 시련…스캔들과 슬럼프

그 사건 이후 이치로는 슬럼프에 빠졌다. 22타수 무안타에 허덕였다. 시즌 타율이 0.347에서 0.322로 추락했다. 이치로보다 한 시즌 먼저 시애틀에 입단했던 마무리투수 사사키 가즈히로는 일본 대중매체의 이런 비열한 행동에 반발했다. 두 사람은 이후 일본 언론과의 모든 접촉을 차단했다.

시간이 약이었다. 이치로는 다시 살아났다. 시즌 타율 0.350을 마크하고 타격왕 타이틀을 차지했다. 242안타를 쳤다. 그 가운데 59개는 내야안타였다. 127득점 56도루도 함께 기록했다. 이치로 덕분에 시애틀은 2001시즌 116승을 따냈다. 1998년 뉴욕 양키스가 작성했던 아메리칸리그 한 시즌 최다승 기록(114승)을 넘어섰다.

이치로는 아메리칸리그 디비전시리즈에서도 12안타를 몰아치며 팀을 승리로 이끌었다. 시애틀의 질주는 양키스와 맞붙은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멈췄다. 이 같은 활약으로 이치로는 당당히 아메리칸리그 신인왕과 최우수선수(MVP)를 동시에 석권한 사상 2번째 선수가 됐다. 골든글러브도 당연히 이치로의 차지였다.

이치로는 2001시즌 무려 13개의 메이저리그와 아메리칸리그, 시애틀의 팀 기록을 새롭게 썼다. 사람들은 4할 타율에 도달할 가능성이 가장 큰 선수로 이치로를 꼽았다. 롭 디블은 티 팬티만 입고 맨해튼 거리를 달렸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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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치로가 메이저리그에 미친 영향

2001시즌 많은 미국인들은 이치로를 좋아했다. 지금까지 잊고 있었던 또 다른 야구를 생각나게 했기 때문이다.

베이브 루스의 등장과 함께 야구는 라이브볼 시대를 열었다. 이후 홈런과 상상을 초월하는 장타는 야구팬들을 흥겹게 해주는 요소였다. 이런 파워 중심의 야구는 선수들에게 근육강화제 복용이라는 편법을 찾도록 유도했다. 약물파동 같은 숨겨졌던 불편한 진실이 드러나자 메이저리그는 한동안 휘청거렸다.

이런 상황에서 이치로의 등장은 초창기의 야구시대를 새삼 기억나게 해줬다. 안타와 도루, 히트앤드런, 주자의 영리한 플레이 등은 그동안 잊고 지냈던 야구의 회상으로 이어졌다. 워싱턴포스트는 “이치로의 등장으로 야구는 한 세기 이전 시대로 돌아갔다. 바로 수비수가 없는 곳으로 공을 치라고 했던 그 때”라고 했다.

이치로는 타이 콥, 로저스 혼스비 등 야구 역사책에서 잠자던 전설의 스타들을 다시 호출했다. 이치로가 그들보다 더 잘하는 선수인지 아니지를 놓고 사람들은 토론했다. 시애틀 선수들도 차츰 이치로의 타격을 따라했다.

더 많은 영향을 준 것은 루틴과 경기장에서 보여준 준비자세였다. 매 타석 경건한 의식을 행하는 듯한 이치로의 준비과정을 많은 미국의 야구 꿈나무들이 따라했다. 타석에서 상대 투수를 바라보며 심호흡을 하고, 한 팔로 가볍게 배트를 돌리면서 투타 대결을 준비하는 이치로의 모습은 17세기 일본의 유명한 사무라이 미야모토 무사시를 연상케 했다.

그의 정신집중방법과 경기 전 훈련과정, 완벽을 추구하는 연습태도 등도 차츰 시애틀 선수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이치로는 경기 전 매일 정해진 웨이트 트레이닝을 하고, 상대 투수들의 피칭 영상을 보고 분석하는 등 루틴을 변함없이 지켰다. 이런 이치로를 지켜보던 동료 브렛 분이 “그런 행동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지겹다”고 했을 정도로 이치로는 단 한 번도 정해진 순서를 빼먹지 않고 반복했다.

구도자처럼 훈련에 정진하는 그의 자세는 시애틀의 훈련 분위기도 바꿨다. 연습 시스템도 이치로의 조언에 따라 달라졌다. 이치로는 “선수들이 정말로 경기를 하려는 의지가 있는지 아닌지 모를 정도로 느슨한 훈련이 있다”고 시범경기 때 루 피넬라 감독에게 말했다. 차츰 이치로 방식의 야구는 시애틀에 전파됐다. 티배팅 훈련이 대표적이었다. 2003시즌에는 새 감독 봅 멜빈이 수비훈련과 스프링캠프, 경기 전 다양한 준비과정에서 이치로의 훈련방식을 도입했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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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비를 존중하고, 자신의 감정을 숨기고, 팬을 사랑하는 이치로

이치로는 야구장비를 대하는 자세에서도 동료들에게 영향을 줬다. 어릴 때 아버지에게 배운 교훈을 잊지 않았다. 매일 경기가 끝나면 글러브를 기름으로 깨끗이 닦고 손질했다. 스파이크도 마찬가지였다. 배트는 경기 때 최적의 습도가 유지되는 장치에 넣어서 덕아웃 자신의 자리 옆에 보관할 정도로 장비에 많은 애정을 쏟았다.

그는 동료들이 글러브를 깔고 앉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왜 선수들이 자신의 장비를 제대로 관리하지 않는지 이해하지 못하겠다. 그래놓고 어떻게 좋은 성적을 내고 장비가 도움을 주기를 바랄까. 글러브를 닦는 것은 내 마음을 닦는 것이다. 잘 먹고 잘 자고 경기 전에 올바른 준비를 하는 것 모두 내 플레이를 더 좋게 만들기 위한 과정이고, 이 모든 것들은 24시간 내내 연결돼 있다”고 했다.

이치로는 어떤 상황에서도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심판의 나쁜 판정에도 전혀 불만을 표시하지 않았다. 상대가 위협구를 던져도, 심장이 터질 듯한 팽팽한 경기 상황에서도 표정변화 없이 묵묵히 자신의 야구를 했다. 이런 그를 보고 사람들은 감정이 없는 야구로봇을 떠올렸다. 이치로는 “나도 다른 선수들처럼 긴장하고 화도 난다. 다만 내가 그런 상태라는 것을 보여주기 싫을 뿐이다. 사람들에게는 겉으로 드러나는 내 투쟁심만 보여주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이치로는 경기 전 훈련을 마치면 외야 스탠드의 팬들에게 다가가서 사인을 해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초창기 야구장의 향수를 느끼게 해주는 그런 행동에 팬들은 더욱 이치로를 사랑했다.

●그라운드를 떠나면 다른 얼굴이 나왔던 이치로

이치로를 향한 모든 시선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그를 오랫동안 지켜봤던 일본의 저널리스트는 “통제를 좋아하는 괴짜였다. 그가 입을 다물고 있으면 사람들은 이치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모르고, 그러면 비난 받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좋은 선수지만 자기밖에 모르는 사람”라고 했다.

사실 이치로는 매스미디어와 전혀 친하지 않았다. 일본 시절에도 그랬다. 그래서 이치로가 메이저리그에 진출한다고 했을 때 일본의 많은 매스미디어 종사자들은 그의 실패를 내심 기도했다. 메이저리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어의 장벽도 있었다. 통역을 통하지 않고서는 어떤 말도 물어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다.

동료들의 평가도 좋지 않았다. 오릭스 시절 함께 지냈던 어느 선수의 폭로. “이치로는 모든 선수들이 하는 아침 산책에 참가하지 않았다. 선수단 버스에도 항상 꼴찌로 탔다. 다른 선수들이 기다리는 것을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남에게 정말 쌀쌀맞은 친구”라고 했다.

이치로의 시애틀 거처 인근에 사는 일본계 사람들도 그를 그리 반겨하지 않았다. “저런 사람이 일본을 대표하고 미국의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로 주위의 평판은 나빴다.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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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이지만 오직 자신의 야구를 향한 열정을 불태운 남자

오직 야구만을 생각하고 구도자의 자세로 야구의 길(구도·球道)을 묵묵히 가는 이치로의 이기심은 차츰 주변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었다. 이들은 이치로에게 정나미가 떨어진 채로 돌아섰다. 한동안 이치로와 붙어 지내던 브렛 분은 이치로와 헤어져 팀 내의 다른 선수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이치로는 외톨이가 됐다. 2004년 메이저리그 한 시즌 최다안타 기록(262개)을 세우고, 2001시즌부터 10시즌 연속 200안타 이상을 기록하는 안타제조기로 역량은 인정받았지만 동료들의 불만도 함께 커져갔다.

이치로는 2011시즌 184안타를 치며 세월 앞에 장사 없다는 것을 확인시켰다. 누가 뭐래도 이제 선수로서는 기량이 떨어지는 38세였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었다. 시애틀은 기다렸다는 듯 2012시즌 도중 이치로를 양키스로 트레이드하며 그동안의 인연을 정리했다. 이치로는 양키스와 마이애미에서 보낸 4시즌 반 동안 200안타의 벽을 넘어서지 못했지만 집요한 현역 욕심과 눈물겨운 자기관리를 통해 선수수명을 연장해왔다.

6년만인 2018시즌 45세의 나이로 시애틀에 복귀한 이치로가 개막전에 등장하자 관중은 기립박수를 쳤다. 10년여 동안 시애틀에서 보여줬던 수많은 아름다운 추억과 선수로서의 모범적인 자기관리, 오직 야구만을 생각하는 순수한 열정에 팬들은 진심어린 박수를 보냈다.

이치로의 이번 시애틀 행은 선수생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과정으로 보인다. 시범경기에서 팀의 많은 외야수 주전 후보들이 부상으로 빠지자 그 빈 공간을 메우고, 이치로에게 영광스러운 은퇴무대를 마련해주고자 했던 것이 시애틀과 이치로가 맺은 컴백 계약의 숨은 이유였다.

이제 이별의 순간이 다가오고 있다. 일곱 살 때 아버지와 했던 약속을 한 번도 어기지 않고 40년 가까이 자기만의 루틴으로 만들어 오랫동안 그라운드에서 생활해온 이치로가 은퇴하는 장면을 보면 많은 생각이 들 것 같다.

김종건 전문기자 marc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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