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현길의 스포츠에세이] 데자뷔-1993년의 김호와 2017년의 신태용

  • 스포츠동아
  • 입력 2017년 9월 20일 05시 3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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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축구를 둘러싼 현재의 상황은 1993년을 새삼 기억나게 한다. 월드컵을 목전에 두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모습이 너무나 닮았다. 1993년 김호 감독이 풀어나간 방법은 2017년 신태용 감독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까.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한국축구를 둘러싼 현재의 상황은 1993년을 새삼 기억나게 한다. 월드컵을 목전에 두고 갈등의 골이 깊어지는 모습이 너무나 닮았다. 1993년 김호 감독이 풀어나간 방법은 2017년 신태용 감독에게 어떤 메시지를 던져줄까.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1993년 10월 카타르 도하에서 열린 1994미국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은 최종전에서 본선행의 주인공이 갈린 각본 없는 드라마였다. 마지막 경기에서 한국은 북한에 3-0으로 이겼지만 자력 진출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동시에 열린 일본-이라크전에서 이라크가 추가시간에 동점골을 넣어주는 바람에 한국은 일본을 제치고 행운의 티켓을 따냈다. 그 유명한 ‘도하의 기적’이었다. 아시아에서는 최초의 3회 연속 본선 진출이었다.

하지만 귀국길의 발걸음은 무거웠다. 대표팀 김호 감독을 향한 비난 여론이 만만치 않았다. 김 감독은 1992년 7월 계약기간 2년에 사인한 최초의 전임 감독이다. 여론이 들끓은 이유는 최종예선에서 일본에 졌기 때문이다.

다른 팀도 아니고 숙적 일본에 무기력한 경기를 하며 0-1로 패한 건 아무리 본선 티켓을 땄어도 용서할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아울러 이 전력으로 본선에 가봐야 창피만 당할 것이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미국 월드컵 최종예선 한일전 모습.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미국 월드컵 최종예선 한일전 모습.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결국 ‘감독 경질이냐, 유임이냐’의 막다른 골목까지 갔다. 이를 놓고 기술위원회가 열렸다. 그런데 엉뚱한 방향으로 흘렀다. 기술위원들 간에 갑론을박이 벌어진 가운데 최종예선 졸전의 책임을 지고 기술위원 전원이 총사퇴한 것이다. 감독의 운명을 결정하는 대신 기술위원들이 모두 물러나는 해프닝이 벌어지면서 결국 고비를 넘긴 김 감독은 유임됐다.

대신 축구협회가 꺼낸 카드가 외국인 지도자의 기술자문 영입이었다. 선진 기술을 접목시킨다는 명분이었다. 88서울올림픽에서 러시아를 우승으로 이끈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이 기술자문으로 왔다.

하지만 대표팀의 작전권은 김 감독이 가졌다. 몇 개월간 불편한 동거 속에서 비쇼베츠는 미국월드컵까지 동행했다.

비쇼베츠 전 감독. 사진제공|FIFA 홈페이지
비쇼베츠 전 감독. 사진제공|FIFA 홈페이지

지금까지 살펴본 24년 전 상황은 결코 낯설지가 않다. 2017년 한국대표팀과 여러모로 겹친다. 시점만 바꿔놓으면 그 때나 지금이나 똑 같은 처지다.

2018러시아월드컵 최종예선 2경기를 남겨두고 감독을 교체한 한국은 최종전으로 치러진 우즈베키스탄과의 원정경기에서 득점 없이 비겼다. 자력 진출이 무산된 가운데 동시에 열린 이란-시리아전에서 이란의 도움으로 행운의 티켓을 따냈다. 말 많고 탈 많은 최종예선이었지만 어쨌든 9회 연속 본선진출을 이뤘다. 현장에선 헹가래를 하는 등 축제 분위기였다.

그런데 여론은 냉랭했다. 귀국 환영행사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문제는 대표팀의 경기력이었다. 신태용 감독이 맡은 2경기에서 단 한골도 넣지 못하자 팬들이 등을 돌린 것이다. 분위기에 맞지 않은 헹가래도 도마에 올랐다. 또 본선에 가서도 믿음을 주기 힘들다는 게 대체적인 반응이었다.

이런 우울한 상황에서‘히딩크 논란’이 불거졌다. 대리인을 통해 ‘히딩크가 대표팀 감독을 맡을 용의가 있다’는 게 알려지면서 불난 집에 기름 부은 꼴이 돼버렸다. 축구협회의 미숙한 대처는 불신감을 키웠고, 결국은 감독 교체를 요구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에까지 이르렀다.

거스 히딩크 전 축구대표팀 감독.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거스 히딩크 전 축구대표팀 감독.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

히딩크가 기자회견에서 “조언을 통해 한국축구를 돕겠다”고 설명했지만 히딩크 영입을 원하는 팬들의 미련은 여전하다. 축구협회는 신 감독의 신임을 확인하면서 “조언을 구할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런 상황이라면 히딩크와 한국축구는 러시아월드컵에서 어떤 식으로든 엮일 수밖에 없다. 다소 불편하겠지만 히딩크의 풍부한 경험을 한국대표팀이 어떻게 활용하느냐가 중요하게 됐다.

다시 1990년대로 돌아가 보자. 김호 감독의 한국대표팀은 미국월드컵에서 기대 이상으로 선전했다. 2무1패로 조별예선에서 탈락했지만, 경기 내용은 좋았다. 스페인전에서는 0-2로 뒤진 상황에서 끈질기게 따라붙어 동점을 만들었고, 세계 최강 독일전에서도 0-3으로 뒤진 후반에 포기하지 않고 2골을 얻어내 큰 박수를 받았다. 4득점 5실점. 아시아 최강의 모습과 함께 한국축구의 가능성을 확인한 대회였다.

이제 신태용 감독 차례다. 러시아월드컵에서 미국월드컵처럼 감동적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최현길 기자 choihg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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