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주 52시간 근무가 나에겐 72시간으로…버스업계 실태 들여다보니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6월 11일 21시 1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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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주 52시간 근무가 나한테는 72시간 근무로 돌아왔어요.”

10일 오전 11시경 서울의 한 마을버스 차고지에서 만난 윤모 씨(57)가 말을 꺼냈다. 힘빠진 목소리에 피곤에 찌든 표정이었다. 그는 최근 사흘간 매일 같이 오전 5시 반부터 오후 11시 반까지 운전대를 잡았다. 운전기사가 모자라서다.

윤 씨가 일하는 마을버스는 8명씩 2개조에 예비기사 1명을 포함해 총 17명의 운전기사가 맞교대로 근무했다. 그러나 7월 1일 근로시간 단축을 앞두고 최근 3명이 이직했다. 회사는 급히 운전기사를 구하기 위한 모집공고를 냈지만 2주가 되도록 지원자가 없다. 윤 씨는 “예비인력이 없어 몸이 아파도 병가를 쓸 수 없다. 급할 때는 정비기사나 사장이 대신 운전대를 잡을 정도다”라고 말했다. 이날 차고지에서 본 마을버스마다 운전기사를 구하는 ‘모집공고’가 빠짐없이 붙어있었다.

● 시내버스 ‘쏠림’에 마을버스 ‘비명’

11일 본보 취재진이 확인한 결과 서울의 마을버스업체 10곳 가운데 7곳 정도의 운전기사가 적정 숫자보다 적었다. 최근 버스업계에 불어 닥친 연쇄 이직의 영향이 크다. 근로시간 단축에 대비해 서울과 경기지역의 대형 버스업체들이 앞 다퉈 경력직 스카우트에 나선 탓이다. 경력직이 모자라니 과거 마을버스에서 첫 운전을 시작하던 초보자까지 시내버스업체로 ‘직행’하고 있다. 대부분 300인 이상 사업장인 대형 시내버스업체는 다음 달 1일부터 추가 연장근무를 제한하는 주 68시간 근무만 허용되고 1년 후 주 52시간 근무가 적용된다.

시내버스업체들도 구인난을 겪고 있지만 영세한 마을버스업체는 당장 사면초가다. 서울 노원구의 마을버스업체 A사는 최근 가용인력이 줄고 있다. 대형 버스업체가 ‘고용 장벽’을 크게 낮추면서 근무환경이나 처우가 열악한 마을버스를 떠나는 운전기사가 이어지고 있다.

마을버스는 시내버스 운전대를 잡기 전 일종의 ‘경력 쌓기’ 코스로 인식됐다. 하지만 최근 버스업계 구인난 탓에 이런 관행마저 사라졌다. 심지어 65세 이상 고령 운전자 우대 공고까지 등장했다. A사 관계자는 “오늘 마을버스를 운전하는 기사 중에서 누가 또 그만둘지 모르는 상황이다”라고 말했다.

서울 영등포구의 B사는 얼마 전 버스 뒷 유리창에 붙인 운전기사 모집공고를 떼어냈다. 한 달 가까이 붙였지만 찾아오는 사람이 없어서다. 결국 알음알음 소개로 조선족 6명을 겨우 채용해 가용 인력을 어느 정도 맞췄다. B사 운전기사 김모 씨(57)는 “지금이야 겨우 버티지만 인력 유출이 계속되면 결국 감차가 불가피하다. 운행 횟수를 줄이고 배차 간격을 늘리지 않으면 결국 우리가 혹사당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경력직 모자라 초보자 대상 ‘구인 영업’

시내버스업체들이 마을버스 등 영세업체 인력을 빼오고 있지만 상황이 여의치 않은 건 비슷하다. 특히 경기지역 시내버스가 심각하다. 상대적으로 여건이 좋은 서울지역 시내버스로 인력이 이동한 탓이다. 서울 시내버스는 서울시 지워늘 받는 준공영제로 운영된다. 이미 주 50시간가량 근무하는 제도가 시행 중이다. 경기 시내버스에 비해 월급도 약 60만 원 이상 많다.

근로시간 단축으로 퇴직금 감소를 우려한 운전기사들이 사표를 선택한 것도 인력난을 가중시킨 이유다. 경기지역의 한 시내버스업체 관계자는 “퇴직금이 줄까봐 하루 30명 이상이 퇴직하기도 했다”고 털어놨다.

경력직 대신 초보자를 고용하는 시내버스 업체도 늘고 있다. 경기 부천시의 시내버스업체 C사는 운전기사 150명가량을 추가 고용해야 한다. 하지만 일주일 내내 면접을 보는 인원은 5명 안팎에 불과하다. 결국 운전경력 2년 이상의 기사만 뽑던 회사정책을 바꿨다. 또 회사 직원들이 대형운전면허 시험장을 찾아 명함을 돌리며 초보운전자를 상대로 ‘구인 영업’도 하고 있다. C사 관계자는 “새로 면허를 딴 사람이라도 회사에서 한 달간 자체 연수를 받으면 시내버스를 운전할 수 있게 했다”고 말했다.

앞서 정부는 지난달 31일 시민불편 최소화를 위해 군 경력자 활용 같은 방안을 내놓았다. 하지만 업계의 불안은 갈수록 커지고 있다. 고속버스 운전기사 김모 씨(47)는 “인력 자체가 턱없이 부족한데 근무시간을 줄이며 평소처럼 버스를 운행할 수 있겠냐”며 “제대로 된 대책이 없으면 결국 피해보는 건 버스 승객들이다”라고 말했다.

구특교기자 kootg@donga.com
김자현기자 zion3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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