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정성은]몰카가 아니라 ‘피해촬영물’입니다

  • 동아일보
  • 입력 2018년 8월 15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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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요즘 내 친구들 사이에선 특별한 의식이 유행이다. 공중화장실에서 용변을 보기 전, 손가락 욕을 날리는 것. 어디선가 찍고 있을지 모를 몰래카메라를 향한 제스처다. 처음 들었을 땐 조금 웃겼다. ‘진짜 그런다고? 그런데 사람 오줌 누는 걸 왜 찍어?’ 순간 잊고 있었던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고3 여름이었다. 서울의 한 남녀공학 고등학교에 다니던 나는 주말에도 ‘야자’를 하러 학교에 나갔다. 복도를 걷는데 저 멀리 한 여학생이 화장실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 뒤로 한 남학생이 따라 들어갔다. ‘뭐지…. 지금 내가 뭘 본 거지?’

화장실 문을 여는 순간 두 번째 칸의 문이 황급히 닫혔다. 첫 번째 칸엔 여학생이, 두 번째 칸엔 남학생이 있는 듯했다. 세 번째 칸에 들어서는데 손이 떨렸다. ‘지금 이게 무슨 상황이지? 소리 질러야 하나?’ 하지만 그 남학생이 정확히 뭘 하려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순간 칸막이 아래로 무언가가 번쩍였다. 은색 손목시계였다. 옆 칸 여학생이 용변 보는 걸 훔쳐보기 위해 두 팔을 수세식 변기가 있는 바닥에 최대한 밀착시키고 올려다 본 것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얼어버렸다.

그땐 걔가 미친 줄 알았다. 그런데 뉴스를 보니 그런 사람이 많았다. 국가대표 선수도, 현직 판사도, 공중보건의도, 음원 차트 순위권 가수도, 심지어 교사도 그랬다. 그 뒤로도 그 남자애는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그 여학생에게 가끔 수학 문제를 물어봤다.

누군가에겐 ‘몰카’라는 게 잘 와닿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런 사건을 목격하고도 잊은 것처럼 말이다. 만약 그날 번쩍였던 게 카메라 불빛이었다면, 당신은 몰카의 폭력성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까? 그렇게 찍힌 영상은 ‘야, 진짜 너만 봐’라는 말과 함께 순식간에 퍼질 것이다.

“몇 년 전 한 줌의 재가 된 내 친구는 어째서 한국 남자들의 모니터 속에 ××대 ××녀라며 아직 살아있는가.” 4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4차 ‘불법촬영 편파수사 규탄시위’ 피켓에 적힌 말이다. 몰카를 야동의 한 종류로만 인식해왔던 당신은 알아야 한다. 그것은 ‘피해촬영물’이다. 피해자가 존재하는 영상이다. 지금까지 ‘국산 야동’으로 유통되었던 영상, 모두 불법이었다. ‘골뱅이’(술에 취한 여성을 성폭행하는 동영상), ‘리벤지 포르노’(연인 사이였을 때 촬영했던 나체 사진, 성관계 동영상 등을 이별한 뒤 상대방에게 보복하기 위해 유포하는 것), ‘자취방 모텔 몰카’ 등.

플라스틱 사용이 심각한 환경오염을 일으키자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매장 내 플라스틱 컵 사용 금지. 어길 시 벌금 200만 원. 하루아침에 카페는 친환경으로 변했다. 디지털 성범죄 역시 마찬가지다. 정부는 할 수 있다. 인간의 존엄을 훼손하는 ‘피해촬영물’을 생산, 유통, 삭제하는 산업화 구조 자체에 대한 국가적 차원의 대책을 마련해 달라.

우리 인식도 변해야 한다. 디지털 성폭력 범죄를 근절하기 위해서는 몰래 촬영된 영상이 그 자체로 성폭력임을 인지하고 이를 클릭하지 않는 문화가 만들어져야 한다. 당신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라 믿는다.
 
정성은 콘텐츠제작사 ‘비디오편의점’ 대표PD
#공중화장실#몰래카메라#피해촬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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