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유형 암기’로 변질된 수학… 요령 주입하는 학원만 북적

  • 동아일보
  • 입력 2017년 2월 27일 03시 0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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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의 붕괴]<1> 무너진 수학 공교육

서울의 일반고 수학 교사인 김모 씨는 수업에 들어갈 때마다 크게 한 번 심호흡을 한다. 교실 문을 열면 곧이어 펼쳐질 갑갑한 풍경을 이겨내기 위해서다. 한 시간 동안 열심히 수업을 해도 집중하는 학생은 한두 명에 불과하다. “애들이 수업을 안 들어요. 강남 강북 어디나 마찬가지죠. 상위권 아이들은 선행학습을 해서 안 듣고, 하위권 아이들은 기초학습 능력이 부족해 못 알아듣고요. 중위권 아이들에게 맞춰 수업을 하지만 어차피 이 아이들은 수학 점수를 요구하는 인(in)서울 대학은 못 가기 때문에 수학에 의욕이 없어요.”

강남 지역의 또 다른 일반고 수학 교사 구모 씨도 비슷하다. 그는 “한 반에 3분의 1 정도는 자는데 그나마 이과라 나은 편”이라며 “문과는 훨씬 더 심각하다. 절반 이상이 이미 중학교 때부터 수학을 포기한 아이들”이라며 한숨을 쉬었다. 구 교사는 “어차피 맞춤형 수업을 못해주니 그냥 자게 둔다. 그게 최선이다”라고 말했다.

○ 공회전 학교 수업, 살기 위해 학원행

수학은 허공을 향해 수업하는 교사와 ‘시간 죽이기’를 해야 하는 아이들만 괴로운 것이 아니다. 수학을 잘하는 학생마저 “수학이 재미없다”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토로한다.

‘불수능’ 평가를 받았던 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 수리 영역에서 단 1개만 틀린 송모 군은 교육열 높은 서울 목동에서 손꼽히는 수학 수재다. 지난 수능에서 100분의 시간이 주어진 수리 영역 30문항 중 28문항을 30분 만에 풀었다. 하지만 송 군은 “내가 고득점을 받은 건 원리 이해나 응용력이 좋아서라기보다는 평소 문제 유형 파악과 빠른 계산 연습을 숱하게 많이 했기 때문”이라며 “문제를 보는 순간 어떤 공식으로 푸는 유형인지 바로 알아야 고득점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한국식 수학 평가의 특징은 ‘짧은 시간 안에 많은 문제를 빠르게’ 풀어야 한다는 것이다. 답을 구하는 것만 중요하며 대부분 풀이 과정은 채점하지도, 부분 점수를 인정하지도 않는다. 학교 시험에선 교육과정을 벗어나거나 선행학습이 요구되는 고난도 문제가 한두 개씩 꼭 등장한다. 학생 간 ‘서열’을 매겨야 하기 때문이다.

○ 경제 격차가 학원 및 학력 격차로

‘수포자’(수학을 포기한 자)가 되지 않기 위해 필요한 것은 ‘요령’과 ‘유형 파악’이지만 학교에서는 이런 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 고득점을 얻기 위해 학원에 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현재 국내 중고교 사교육 시장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과목은 수학이다. 지난해 발표된 2015년 통계청 조사에 따르면 국내 가구의 42.5%가 자녀에게 수학 사교육을 시키고 있다. 사교육 참여율은 해당 가정의 경제 소득과 비례한다. 가구의 월평균 소득이 100만 원 미만일 때 수학 사교육 참여율은 13.2%인데 소득이 100만 원씩 늘어날 때마다 수학 사교육 참여율은 23.4%, 33.8%, 42.0%, 48.0%, 51.5%, 54.4%로 계속 늘어났다. 월 소득이 700만 원 이상일 때 참여율은 56.4%로, 월 소득 100만 원 미만 가정보다 4.3배나 높았다.

올해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정모 양은 수학학원만 일주일에 3개를 다닌다. ‘생각하는 힘’을 키워준다는 사고력 수학학원과 계산 요령을 훈련시켜주는 연산학원, 문장형 문제 습득 등 교과 대비 선행학습을 도와주는 학원이 그것이다. 학부모 이모 씨는 “대치동에서 주 3회 수학은 평범한 수준”이라며 “특히 연산수학은 유치원 때부터 필수다. 아이가 싫어해도 효과가 좋아 그만둘 수가 없다”고 말했다.

또 다른 강남지역 학부모 김모 씨는 “최근 이공계가 대세인 데다 올해부터 수능 영어가 절대평가가 돼 수학 사교육에 대한 엄마들의 관심이 더 높다”며 “과거 영어 대 수학의 학원 비율이 3 대 2였다면 이제는 영어를 하나 줄이고 수학을 하나 더 늘리는 분위기”라고 전했다.

고교 교사 김모 씨는 “현장에서 보면 경제 격차와 사교육 여부가 수학 평가 결과와 정확히 연결된다”며 “가끔 중위권 아이들 중 수학적 사고력이 뛰어난 아이들이 보이는데 현실적으로 시험에선 이 아이들이 2, 3년씩 선행학습을 한 아이의 점수를 뛰어넘지 못한다”고 말했다.

입시의 성패 역시 학원에 의지한다. 서울 지역 명문 공대에 다니는 이모 씨는 경기 구리 지역 일반고 출신. 그는 “내 인생의 수학 선생님은 인강 강사인 S 선생님”이라며 “S 선생님이 없었다면 난 절대 대학에 못 갔을 것”이라고 단언했다. 그는 “학교 선생님을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학교 수업만 들어서는 수능이든 학교 시험이든 절대 고득점을 얻을 수 없다”면서 “학교 선생님들께 수능을 보라고 하면 만점 맞을 사람이 없을 것”이라며 쓴웃음을 지었다.

○ “지금 수학 교육, 수학도 교육도 아니다”

학교 수업은 원리와 기본 개념을 지향하지만 평가는 응용과 고난도를 추구하는 엇박자 속에 학원에 갈 경제력이 되지 않거나, 속도전 중심의 문제풀이 평가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은 결국 수학 자체를 포기하고 만다.

이용훈 부산대 수학과 교수는 “한국의 수학 평가는 계산과 속도가 핵심인데 이건 엄밀히 말해 수학이 아니다”라며 “부부가 다 수학 교수인데도 우리 애가 고등학교에 가더니 수학을 포기하더라”며 고개를 저었다.

김정한 고등과학원 계산과학부 교수는 “수학은 암기 과목이 되기 시작하면 외울 게 너무 많은 학문”이라며 “문제 유형과 공식을 외워 푸는 주입식 교육과 평가가 이뤄질 때 가장 힘들어지는 학문이 수학이고 그래서 모든 과목 중 가장 먼저 수포자가 나올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임우선 기자 imsu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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