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30 세상]세 번째 사직서, 그리고 새로운 시작

  • 동아일보
  • 입력 2015년 3월 31일 03시 00분


코멘트
이영민 전 빅이슈코리아 편집장
이영민 전 빅이슈코리아 편집장
지난 1년간 일하던 빅이슈코리아를 2월 말일 자로 사직했다. 첫 직장과 빅이슈코리아 사이에 3개월쯤 다닌 직장이 있으니 내게는 세 번째 사직서였다. 일단 지친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서 본격적으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심산이었다. ‘아주 새로운 방식으로 콘텐츠를 담는 독립잡지’에 내 이름 박는 그날을 그리며 씩씩하게 사무실을 나왔다.

처음 일주일간은 두문불출했다. 자고 싶은 만큼 잠을 잤고 입맛이 당기는 대로 먹었다. 그런데 조금씩 불안감이 밀려왔다. 당장 해결해야 할 집세와 밥값이 방안을 둥둥 떠다니는 듯했다. 국민연금과 건강보험 보험료도 내야 하는데 이건 또 어떻게 해야 하지? 30대 후반에 접어들다 보니 이러저러한 현실적 문제 앞에 마냥 용감할 수만은 없었다.

일이 필요했다. 전문성을 키울 수 있는 일을 찾아 현재와 미래를 대비하고, 여가를 활용해 독립잡지 창간하면 삶이 행복해질 것 같았다. 그러던 중 평소 선망하던 기업의 채용공고를 발견했다. 기자 경력을 살릴 수 있는 홍보 업무이고, 내가 관심 있는 문화 콘텐츠 분야에서 일하는 기업이라 가슴이 뛰었다. “서류 심사를 통과했습니다. 면접을 보러 오세요”라는 전화가 온 날, 세상이 내 리듬에 맞춰 춤추는 듯 느껴지기도 했다.

면접날이 됐다. 설레는 마음으로 목욕재계한 후 공들여 머리를 손질했다. 1년에 한 번쯤 꺼내 입는 정장이 행여 구겨질까 봐 지하철에서 자리에 앉지도 않았다. 면접장에는 나보다 열 살쯤은 어려 보이는 청년들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었다. 그들을 보니 ‘내가 과연 저 패기 어린 청년들과의 경쟁에서 이길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고개를 들었다. 불길한 예감은 틀리지 않는다. 긴장감을 이기지 못한 나는 그날 면접에서 여러 차례 버벅댔고, 시원하게 낙방을 했다.

결과를 접한 뒤, 나는 ‘왜 기회를 안 주나’라며 해당 기업을 원망했다. ‘세상에 나를 알아주는 이가 적구나(世路少知音)’라는 최치원의 시구를 되새기며, ‘다시는 그쪽으론 발길도 돌리지 않겠다’는 유치한 다짐도 했다. “내게 (최고의) 한순간을 주세요”라는 후렴구가 있는 휘트니 휴스턴의 ‘원 모멘트 인 타임(One moment in time)’을 고장 난 라디오처럼 부르며 쓴 소주를 들이붓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이튿날이었다. 해가 중천에 솟아 있을 때 눈을 떴다. 라면으로 쓰린 속을 달래고 침대에 누워 창밖을 보는데 봄 하늘은 유독 파랬다. 소설가 박완서의 자전적 소설 ‘한 말씀만 하소서’가 생각난 것은 그때였다. 작가가 생때같은 아들을 잃고 부산의 한 수녀원에서 절규하던 시기의 이야기. “왜 내 아들이어야 하느냐”고 울부짖던 작가는 우연한 계기를 통해 “내게 이런 일이 생기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지 않느냐”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마음을 바꾸면서 조금씩 절망을 딛고 일어나는 이야기를 되새겨봤다.

그렇다. 나 역시 “왜 내게 기회를 안 주느냐”만 따질 일이 아니었다. 내가 남들보다 기회를 더 얻어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게다가 나는 이미 직장에 세 차례 들어간 경험이 있으니, 세 번의 기회를 얻었던 셈이다. 그런데도 극심한 청년실업 속에서 20대의 기회를 빼앗으려 했으니, 몰염치도 이만한 몰염치가 없다.

돌이켜 보면 나는 참 불평불만이 많았던 것 같다. 월급을 많이 주는 직장에서는 놀 시간이 없다고 불평했고, 조금이나마 나눔에 참여할 수 있는 직장에서는 먹고살기 힘들다고 투덜댔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물심양면으로 풍요로운 직장은 왜 내 몫이 아닐까’라며 신세 한탄만 하느라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 게 있었다. 단 한 번뿐인 내 삶을 제대로 살 ‘내 인생 최대의 기회’가 하루하루 내게서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던 것이다.

조급해하지 않기로 했다. 조금 느리더라도 신중하게 내게 합당한 자리를 찾아보기로 했다. 직장이 없어 여유로운 시간은 독립잡지 창간을 위해 매진하면 될 것. 물론 삶은 지극히 현실적인 것이다. 생활고가 삶의 여기저기에 잠복해 있다가 나를 기습할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내겐 24시간 주야 대기 아르바이트라도 할 수 있는 건강한 몸이 있다. 나의 기회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영민 전 빅이슈코리아 편집장
  • 좋아요
    0
  • 슬퍼요
    0
  • 화나요
    0
  • 추천해요

댓글 0

지금 뜨는 뉴스